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Oct 08. 2020

헤어져도 헤어진 게 아니야


깔끔한 이별이란 없는 걸까. 아침부터 핸드폰을 붙들고 묵묵히 수화기 너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맥이 탁 빠진다. 통화 시간이 20분이 넘어간다. 이제 그만하자는데, 뭐가 이렇게 길고 어렵고 복잡하고 구질구질한가. 마음 같아서는 알아서 하라고 한마디 하고 끊고 싶지만, 마음 같지가 않은 우리의 질긴 인연 끊어내기 위한 절차가 구만리다. 오늘 아침, 신용카드 두 장을 해지했다(해지에 총 1시간 50분이 걸렸다. 믿어지는가?)  


반갑다, 신용카드야!

나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만들려고 만든 건 아니었다. 인턴으로 근무하던 시절, 사무실에 카드 하나 만들라며 영업맨이 방문했는데 상사가 하나 있으면 좋다기에 얼결에 만들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금전 개념이 별로 없기도 했고 손에 잡히는 게 카드이니 편하게 긁기 바빴는데, 매달 결제일이 돌아오면 "아니, 내가 언제!" 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걸로 끝냈으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쓸 돈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통신요금할인, 대중교통할인 등 각종 혜택이 포개지면서 쉽게 해지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혜택이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신용카드를 하나 더 만들었다(처음이 힘들지...). 찬찬히 들여다보면 얕은 개울물 바닥처럼 빤한 혜택보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과소비의 심연을 진작에 눈치챘을 텐데.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날파리처럼 맹목적인 나의 소비패턴이 꼭 신용카드 탓은 아니었다. 월급이 들어오면 이틀 만에 다 쓸 정도로(그렇다고 명품을 산 것도 아니다) 억눌린 뭔가를 돈으로 풀던 시절이었으니까.


돈은 삶에 대한 의욕이다. 많고 적음을 떠나서 돈을 벌고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삶의 일부분이다. 돈이 없으면 당장 먹을 수 없고 입을 수 없고 잠잘 수 없다. 돈을 벌러 사회로 나온 나는, 돈에 대해서 나른하고 무감각하고 무기력했다. 내가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하기 싫은데 남들 다 하니까,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돈은 필요하니까 돈을 벌기 위해  매일 출근했다. 그저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부피감의 우울함과 화가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분노와 우울이, 막상 들여다보면 마냥 이유 없는 투정이 아니었음을 그땐 몰랐다. 좀 더 옳은 방향으로, 좋은 방향으로, 나 자신이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책상에 앉아서 메신저로 입사 동기가 상사 욕하는 걸 맞장구쳤고,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다'는 친구들의 카톡에 열렬히 응답했다. 매달 힘들게 돈을 벌고 허무하게 썼다. 애써 쌓은 모래탑이 찰싹, 작은 파도 한 번에 녹아 없어지듯이.


돈에 관한 태도는 곧 삶에 관한 태도와 직결된다. 매달 나가는 월세를 버거워하면서도 전세로 옮긴다거나 하지 않았고(정확히는 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말정산도 받지 않았다. 그냥 모든 돈이 나를 통해 흘러들어왔다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저축도, 보험도 없고, 미래에 대한 이렇다 할 계획도 없고 하루하루 출퇴근만을 반복하는 삶. 그때의 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살아가는 일에 별로 의욕이 없는 사람'이겠지. 아무 이유없이 바나나 30송이를 사는 사람이 나였다(바나나 1송이에 보통 7,8개의 바나나가 달려있습니다).



잘가라, 신용카드야!

돈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깨닫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모임의 한 분이 부동산 투자로 인해 몇 년째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스트레스와 우울이 극에 달해 "돈 없으면 죽어야죠!"라고 화를 벌컥내다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싫다고 했다. "돈이 없는데 왜 죽어야 된다는 생각을 할까요? 전 왜 이럴까요?" 그 말을 듣던 다른 분이 "돈은 생명이니까요. 생명 자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해요."라는 말을 했다. 그렇구나. 돈이 생명이구나. 나른하고 무기력하던 그 시절의 나는, 전투 게임에서 상대방에게 여기저기 알뜰하게 실컷 얻어터지고 아슬아슬 바닥을 치려하던 게임 캐릭터와 많이 닮아있지 않았을까.


"돈=생명"이라는 비장한 공식 덕분에, 갑자기 십 년 가까이 사용하던 신용카드를 없애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다.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던 카드 명세표를 오늘따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동안 누리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혜택'들이 과연 혜택인가 싶게 별 볼 일 없는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오늘 해지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8년 가까이 쓰던 신용카드는 주유 혜택이 큰 카드였다. 난 자동차가 없다. 맙소사.


고백하자면 아직까지도 나는 지금도 돈에 대해서 얼마간 나른한 태도를 갖고 있다. 돈에 대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애매한 정의를 안고서. 해지의 계기도, 시도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달 갑자기 작게 가진 술자리에서 재테크에 능한 분이 신용카드부터 없애야 한다는 말을 하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지 신청을 하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끝내 포기한 적도 있다. 실은 얼마 전에 혜택이 크단 이유로 카드 하나를 더 만들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씀씀이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도 카드 한 장이 더 생길 때마다 소비금액이 카드 수에 비례해 착착 늘어난다는 점이다. 미루고 미루다 오늘 가지고 있는 카드들의 혜택을 확인하고, 약 두 시간을 들여 필요 없는 카드들을 정리했다. 발급은 1분인데 해지절차는 참으로 지루하고 찐득거린다.

"고객님, 사용하시면서 어떤 점이 불편하셨을까요?"

"지금 해지하시면 그동안 쌓인 포인트가..."

"다른 혜택이 있는 상품을 추천해드릴까요?"


너무 편해서 이제 좀 덜 하려고요. 끝까지 내 발목을 잡는 기존 포인트도 과감히 포기하고 해지를 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카드 한 장의 무게가 이렇게 컸구나. 해방감에 갖고 있던 카드를 반으로 접어 구겨버렸는데, 퇴근할 때야 알았다. "아! 교통카드로 써야 하는데!" 꾸깃꾸깃한 카드를 펴서 교통카드 단말기에 갖다 대니 잘 찍힌다. 다행인 동시에 한편으론 무서웠다. 신용카드의 생명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이제 내겐 신용카드 한 장이 남았다. 이 글을 쓸지 말지, 쓴다면 공개할 수 있을지 말지 고민이 많았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면서도 돈에 관심도 없고 돈 관리를 못해온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럽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신용카드를 없앤다는 건 (물론 완전히 없애진 못했지만) 엄청난 시도이고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이렇게 한자 남긴다. 어쨌거나 좀 더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선택이니까.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치과도, 이사도 가야한다. 운전도, 수영도 배워야한다. 미루고 미루고 미뤘던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 정리해야한다. "삶에 대해 점점 더 의욕을 더해가는 중"이라고 오늘의 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방송국으로 출근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