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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Oct 08. 2020

참을 수 있는 존재의 무거움


어제였나,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휙휙 넘기다가 핸드폰 대리점에 불을 지른 60대 이야기에 눈과 손이 딱 멈췄다. 그 순간 바로 올라오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섬찟한 느낌에 기사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다가 회사 동료가 "그 영상 봤냐"며 말을 꺼내기에 오늘 비로소 클릭해서 기사와 영상을 봤다. 아예 작정한 듯 기름을 준비해 간 60대 여성이 바닥에 기름을 뿌리고 라이터를 켜고... 그리고 3,2,1 빵! 대리점 주인과 60대 여성 모두 화상을 입고 입원 치료 중이라고 한다. 불을 지른 이유는 핸드폰 요금이 많이 나왔기 때문. 비슷한 케이스가 얼마 전에도 있었다. 한 여성이 화가 난다는 이유로 승용차를 타고 그대로 편의점으로 돌진한 사건. 더욱 경악할 만한 사실은 편의점 내부에서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모든 기물을 더 크게 망가뜨렸다는 사실이다. 여성이 화가 난 이유는 편의점 주인이 우편물을 분실했기 때문이란다.


지난여름 가졌던 독자 강연회에서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아침부터 술 취해서 길가는 사람들한테 마구잡이로 욕하는 사람들 보면 부러워요. 아, 나도 저렇게 한번 해보고 싶다. 이유도 없이 막말하고 아무나 붙잡고 소리 지르고 싶다... 그럴 때 있어요." 내 말을 들은 몇몇 사람이 큭큭 웃은 적으로 기억한다. 나는 감정을 내 안에 고요히 가두는 성격이기 때문에, 기분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심 부러울 때가 있다. 어쩌면 저렇게 앞뒤 안 가리고 자기 기분에 충실할까,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하나. 화를 내는 입장에서는 앞뒤를 안 가린다기보다는 화에 사로잡혀 앞뒤가 안 보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테고, 뒷감당 같은걸 신경 썼다면 애초에 화를 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성실히 출근하다가 아침부터 영문도 모르는 쌍욕을 들으면 오갈 곳 없는 화가 부글부글 끓어대지만, 그 정도는 이제 애교로 봐줘야 하나 싶게 화의 스케일이 커졌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만한 장면들이 일상의 곳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다. 차를 타고 건물을 들이박고, 기름을 들이붓고 불을 지르고, 이유 없이 때린다. 아,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한 친구는 본래 인간의 본성이 악한 거라며 성악설을 주장했지만, 나는 절대적인 성선설의 입장이라 사람들이 빠르게 변하는 이유를 고민해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점점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이유는 대체 뭘까? 일상이 사람들을 기다림과 자꾸만 떨어뜨려 놓는다. 기다림이 배제된 일상이 미덕이 된 지 오래다. 무엇을 기다려본 게 언제였더라? 가만히 손가락을 꼽아봐야 할 정도로 하루 중 기다림이 깃든 순간이 드물다. 출퇴근 지하철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 맞춰 온다. 자정까지만 주문을 하면 다음날 새벽에 쨘, 하고  앞에 주문한 물품이 도착해있다. 한 배달앱은 '왜 남의 집에 들렀다 오느냐, 내 음식만 가지고 바로 튀어오라'는 메시지를 내세워 광고를 한다. 점심때 동료들과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가면서 메뉴 주문을 한다. 기다림 없이 바로 먹기 위함이다. 지난주에는 친구와 편의점에 들렀는데, 친구가 전자레인지 3분을 돌리면서 "3분이 왜 이렇게 길어."하고 중얼거렸다. 나도 꽤나 길게 느꼈던 시간이라 공감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더 사라지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3분도 제대로 기다리기 어렵게 된 거다.


3분도 참기 어려운데 화는 오죽할까. 내 안에서 불꽃이 폭발하는데 어떻게 3분 동안 기다린단 말인가. 당장 내 안에 불을 지른 눈앞의 상대방을 응징하기 위한 행동 모드에 돌입한다. 앞도 뒤도, 미래에 대한 고려도 없다. 화를 내는 사람에겐 오직 지금뿐. 사람들이 축가로 그렇게나 많이 부른다는 라 미제라블의 <지금 이 순간>이 그들의 주제가다. "...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던진다..." 그 사슬에 조금만 더 묶여있어도 좋았을 텐데, 대체 무슨 마법인지 화를 내는 순간에는 엄청난 힘이 생겨 그간 나를 묶어왔던 모든 것들을 다 벗어던지고 화를 '싸지르게' 된다. 화를 내는 행동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싸울 상황에서는 싸워야 한다. 감정을 무조건 억누를게 아니라 제대로 표현하고, 상대방과 원만하게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이럴 때 감정의 고삐는 내가 쥐고 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면, 마구잡이로 날뛰는 이 녀석을 어떤 방향으로 틀지, 어떻게 달래고 어루만질지는 모두 나의 권한이다. 고삐를 놓치면 날뛰는 감정은 상대방뿐 이니라 나도 다치게 한다. 그러니 감정의 고삐를 제대로 그러쥐는 훈련을 평소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전에는 이런 훈련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일상의 대부분이 기다림의 몫이었으니까. 기다림의 지분이 점점 적어지고 마침내는 기다림 자체를 소멸해버리기작정한 것 같은 요즘의 일상에서는, 기다림을 연습해야 한다. 흘러가는 일상 중에 기다림의 몫을 굳이 따로 빼두어야 한다. 왜냐고?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앞의 얼굴에 주먹을 뻗지 않기 위해서, 지하철 2분 연착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내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하루 중 적어도 한 장면만큼은 천천히 흐르게끔 두고 싶어서, 그런 장면이 차곡차곡 쌓이는 인생도 꽤 괜찮을 것 같아서.


내가 기다림을 일상으로 초대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의 카페에 가는 거다. 점심을 먹고 나면 2,30분 밖에 남지 않아 망설이게 되는데, 그래도 좋아하는 책 한 권 들고 카페에 가서 나무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는다(내 지정석이다). 책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도로의 자동차들도 보고,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도 보고, 의자에 닿는 햇살도 바라보고, 같은 공간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고(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린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들이니까), 한 두문장 정도 읽다가 사무실로 돌아온다. 뭐 한 것도 없어 시시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이 시간이 좋다. 책장 사이에 가름 끈을 놓는 것처럼, 잠시라도 일상의 속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을 가지고 나면 오전과 오후 사이에 가름 끈 하나가 놓인 것 같다. 출근하느라 바쁘고 피곤했던 오전은 다 잊고 조금은 느릿한 호흡으로 오후를 시작할 수 있다. 불필요한 기다림을 줄일 수 있다는 건 참 좋고 감사한 일이지만, 기다림이 사라지는 요즘에는 기다림을 굳이 만들어야 한다. 전자레인지 3분 돌려 새싹이 열매 맺지 않듯 기다림에겐 기다림의 역할이 있고, 기다림이 우리를 꽤 괜찮은 존재로 길러내니까 말이다. 아이였던 우리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어른이 되었으니 이왕 어른이 된 것, 기다림을 충분히 머금은, 묵직한 존재가 되어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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