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땡 하기 무섭게 다들 나가버린 점심시간. 그날따라 유독 입맛도, 기운도 없어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작가님'을 찾는 전화가 왔다. KBS 라디오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아, 나 작가였지. 지난여름에 말이 나오기 시작하던 방송을 이제 녹음하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있냐는 피디님의 물음이었다. 추석 당일에 녹음을 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꽤 빽빽한 인터뷰 질문지를 받았다. 늘 내가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인터뷰 기사를 쓰는 입장이었는데 인터뷰이가 되고 보니 기분이 살짝 묘했다.
추석 당일에 녹음이니 하루 전에 진득하게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인터뷰 대답도 작성하고, 내 목소리도 녹음해서 한번 들어보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계획했지만, 계획은 언제나 계획으로 그치고 만다.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번쩍 뜬 것까진 좋았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었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오랜만에 친적집을 찾은 아이들의 발 구르는 소리와 비명을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이를 악물면서. 라디오 녹음이면서 웬일인지 헤어컷 예약을 했는데 그마저도 게으름을 피우느라 가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싶지만 더욱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오후 네시나 되어서야 미적미적 밖으로 나왔다. 나를 밖으로 밀어낸 건 아이들의 비명과 괴성에 울음이 섞이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들을 존경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들을 존경한다. 길거리에서 아이에게 벌컥 짜증을 내는 엄마들을 (그때는 "왜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하지 못할까?" 의아했지만) 이해한다. 조용히 좀 하라는, 가만히 있으라는 화 섞인 부모들의 고함을 동정한다. 그렇지만 나는 둘 다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지금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옆구리에 끼고 간 노트북을 카페 3층에 펼쳐놓고 창밖을 한참 바라봤다. 나무 정수리가 노르스름하게 물이 들어있었다. 손바닥에 노란 물감을 묻힌 누군가가 슬쩍 쓰다듬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가을이 왔구나, 또 가을이 왔어. 아이들의 비명과 부모들의 고함소리에 쫓기다 시피하며 가방을 싸느라 별생각 없이 집어 들고 나온 수첩을 펼치니 아직 다가오지 않은 10월의 어느 날짜가 적혀있었다. 지난해 이맘때 한참 <스님과의 브런치> 원고를 준비하면서 끼적였던 글귀들이 빼곡했다. "회사 때려치우지 말고 꾸준히 쓸 것"이라는 글귀를 볼 땐 웃음이 픽 났다. 아니, 지금 내 마음을 어떻게 미리 알았대? (인버전인가). 노트를 끼적이던 1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무엇이 다를까. 노랗게 물든 나무 정수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인생에 대해서 막연하고 막막하고, 앞으론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이 수시로 고개를 든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가방을 뒤적여 챙겨 온 내 책을 꺼냈다. 도망가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아무도 훔쳐가지 못하는 내 시간과 고민이 들어있는 분명한 물성. 오늘 오랜만에 검색을 해보니 온라인 헌책방에서 4천 원에 팔리고 있는 내 책(헌책방에 즐비한 책들을 볼 때마다 1. 이걸 왜 팔았을까? 2. 작가는 헌책방에서 자신의 책을 발견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3. 자기의 책을 파는 작가도 있을까... 등의 질문이 줄줄이 떠오르는데, 내가 오늘 느꼈던 감정은 '앗, 나도 이제 잘 나가는 작가?'였다. 논리에 개연성은 없다). 한 친구가 아는 작가의 소식을 전하며 "책 내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하던데?"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물론 드라마, 영화 한 편에 출연해 인생을 뒤엎은 배우가 있는 것처럼 책 한 권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르며 자리매김을 하는 작가들도 있겠지만, 책을 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지구 상에 책은 이미 넘쳐날 정도로 많고, 오늘도 무수한 작가들이 책을 출판해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책은 계속 쏟아져 나올 테니까. 책을 내기 전에는 가끔 서점을 돌며 '이 많은 책 들 중에 내 책이 읽힐 확률이 몇 프로나 될까?'싶어 막막하고 막연한 감정이 들었는데, 책을 딱 한권낸 이 시점에도 그 막막하고 막연함은 여전하다. 인생의 기본값은 막연하고 막막할진대 책 한 권으로 해쳐나가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산일지도 모른다. 책을 내도 달라지는 건 크게 없지만,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책이 있다는 거다. 도망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엎질러진 물처럼 그렇게 이 세상의 어딘가에 제 몫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렇게 있다는 거다. 하하하. 정답이 좀 싱겁나?
얼마 전에 단골 미용실에 들렀다가 사인을 해드리게 됐다. "누나, 책 내면 어떤 기분이에요?"하고 해실해실 밝은 얼굴로 늘 나를 맞아주는 미용사분이 물었다(뀨 디자이너님, 읽고 계신가요!). "어... 그냥 책을 낸 거예요."하고 덤덤하게 답했더니, 그가 "누나 책 맨날 보세요? 전 제가 책 냈으면 맨날 볼 거 같아요."하고 대답했다. 아니요! 책을 내고 나서 독자의 마음으로 책을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아쉬운 단어와 문장이 번번이 발목을 잡아서 마음 편히 읽지 못했다. 끝까지 맘에 안차던 꼭지는, 마치 못 나온 졸업앨범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뛰어넘기도 여러 번. 빽빽한 인터뷰 질문지에 대한 답을 찾느라 나도 내 책을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독자의 마음으로 읽게 됐다. 잘 쓴 책이구나, 공들여 만들었구나 하는 마음이 이제야 들었다(그리고 안도하기 무섭게 피디님이 추가 질문지라며 뭔가를 또 잔뜩 보내왔다).
나의 첫 책은 잔잔하고 뭉근한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로서 감사한 일이다. 해변의 모래알만큼 수많은 책들 중에 누군가 내 책을 읽는다니. 그리고 나는 (나조차 자주 잊는)'작가'로 조금씩 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무도 몰라줘도 나 스스로 작가라는 사실을 감각하고 있어야 하는데, 늘 송구할 정도로 반대의 입장이다. 다들 나를 작가라고 부르는데 나 스스로 그 호칭에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아까 말을 꺼낸 그 노트에 보면 '매일 쓰자'라는 메모가 수시로 등장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원이라는 명분이 있지만 쓰려고 했다면 쓸 수 있었다. 쓰려다 못 쓴 글, 쓰다만 글이 대체 몇 편인가. 이 글도 카페에 있다가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져 쓰게 됐다. 아니면 일찌감치 집으로 가서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배를 두드리며 누웠을 것이다.
지금 바로 '작가적'으로 살진 못할 것이다. 작가적인 삶이라는 게 과연 있나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작가'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좋은 작품에 대한 갈망과 고민을 놓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좋은 것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은 시월이고, 작가로서 방송국에 출근을 하는 첫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