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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Nov 11. 2020

삶의 한 순간 남기기


한 달 전부터 예약된 직원 프로필 촬영이 있었다. 분기마다 해외며 국내 워크숍을 빠트리지 않는 회사-그래서 입사했지만 나의 입사 시기와 맞물려 코로나가 터졌다-인데, 올해는 이렇다 할 조차 가지질 못했으니 회사 차원에서 마련한 작은 이벤트였다. 텀을 두고 팀별로 촬영이 이루어졌고 우리 팀 스케줄은 맨 끝이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다른 이들의 촬영본을 보면서 이런 옷을 입어야겠다, 포즈는 이렇게 해야겠다, 다이어트를 해야겠다 등의 거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 막상 촬영 당일에는 그전날의 외근에 피로가 겹쳐 알람도 못 듣고 겨우 일어나 출근했다. 헝클어진 내 머리를 본 직원 한 분이 혀를 차며 구루(헤어롤)을 말아주었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그대로 멈춰라'가 되어버리는, 다소 촌스러운 유전자를 타고났기 때문에 사진 찍히는 걸 어려워한다-정확하게 말하면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만 결과물에 낙심하는 스타일. 아니 내가 이렇게 생겼나!-. 지인들이 찍은 프로필 사진을 볼 때마다 어디 나도 한번, 이라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마땅한 기도, 지대한 결심도 없었다.그렇지만 사람 인생은 알 수 없다고 출간 임박해 출판사에서 저자 사진을 얘기하는 바람에 급하게 스튜디오 예약이라는 걸 처음 해보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웃었다가 더 크게 웃었다가 허리를 폈다가 더 크게 폈다가를 반복하며 힘든 촬영을 마친 기억이 있다(그러나 결과물이 맘에 들지 않아 결국 가지고 있던 핸드폰 사진으로 대체했다). 한 번의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좀 더 잘 해내고 싶다는-실은 이참에 다음에 쓸 저자 사진을 찍어보자는-의욕이 앞섰지만, 뻗친 머리로 간신히 출근한 사람에게 프로필 촬영은 사치 아닌가. 새벽에 일어나 화장도 하고 옷도 고르고 싶었지만 이 모든 것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그저 묵묵하게 전철을 타고 예약된 스튜디오로 향했다. 담당 사진작가를 기다리며 최후의 최후까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고치는-어제는 눈썹도 하고 속눈썹도 붙였다는-다른 분도 있었지만, 될 대로 대라는 심정으로 내 순서를 기다렸다.  


내 이름을 부르며 나타난 작가님과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어떤 콘셉트로 찍고 싶은지, 평소 좋아하는 색깔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다. 시작부터 나는 조금 불편한 마음이 되었는데 내 이름이 인터넷 소설 주인공 이름과 비슷하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주야장천 칭찬 일색의 말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옷 사러 가면 항상 듣는 피부가 하얘서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세요, 와 같은 말들. 한두 번 들으면 하하 웃겠는데 마주 보고 계속 들어야 하니 하는 사람도 그렇겠지만 듣는 사람도 마음이 어려운 말들. 시뻘겋게 눈에 핏발이 서있는 촬영 원본을 보면서도 눈이 너무 예쁘세요, 반짝반짝하세요와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고 늘어놓아야 하는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내게 건넨 말들 중 몇 퍼센트가 진심일까라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해졌다. 간격 없이 나를 향해 마구 쏟아지는 칭찬을 손으로 간신히 막아내몇 번이나 그런 말 안 하셔도 돼요, 그냥 편하게 작업하셔도 돼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 그렇지만 생판 모르는 남과 몇십 분을 함께 하면서, 가장 가볍고 가장 손쉽게 환심을 살 수 있는 말들을 늘어놓지 않는다면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장 편하고 안정적인 작업을 하는 중일 수도 있는데, 감정 노동을 하지 말아 달라는 나의 말이 어쩌면 노동의 무게를 더는 것이 아니라 더하는 건 아닐지. 셋째 손가락을 날리고 싶은 이를 향해 되려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친절과 웃음을 지어 보였던 그간 나의 행적을 돌이켜보며, 마구잡이 칭찬을 꾹꾹 삼켰다. 온통 타자를 향한 그녀의 발화 중에 딱 하나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고작 사진 하나 찍으러 가서 흩어지는 말들의 진위 여부씩이나 따져보려는 내가 한편으론 참 피곤한 사람이다 싶지만-마음이 자주 울적해서 긍정적으로 살기를 결심했고 오늘이 2일 차라는 말이었다. 스튜디오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주식 박사로 불리는 과장님 한분이 촬영 단가를 따져보며 하루에 몇 명만 찍어도 돈이 얼마냐고, 진즉에 이런 기술을 배워야 했는데 하고 몇 번이나 통탄한 걸 보면, 그녀의 정확한 벌이를 알 순 없지만 어쨌거나 누군가는 그녀의 입지를 몹시 부러워하고 있다며 위로랍시고 이야기를 해줄까도 잠시 고민했다. 힘내세요, 누군가는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고 계시답니다. 하하하!


최근 승진까지 했다는 그녀는 노련한 말솜씨와 사진 기술로 분명 바보같이 웃고 있었을 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눈코입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사람을 만드는 기술에 대해서 고민해보며, 마치 한 대도 때리지 않고 사람을 울리는 기술 같은 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뒤 내게 완성된 사진과 함께 인스타그램 아이디와 추천 해시태그까지 건네는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꾸벅하고나오면서, 그녀가 만났을 또 다른 사람들을 인스타그램으로 찾아봤다. 하나같이 그녀에 대한 칭찬일색이었고 '사진만 찍은 게 아니라 힐링했다' '자존감을 찾을 수 있었다' 등의 후기가 많이 눈에 띄었다. 촬영에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3, 40분 전후로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누군가의 깊고도 지극한 칭찬을 반복적으로 듣고 있으면, 잊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더불어 바닥에 납작 붙어있던 자존감이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에는 충분하니까. 나도 같은 노동자로 타인이 일하는 방식에 감을 놔라 배를 놔라 할 건 아니지만, 남을 너무 부풀려주느라 자기가 너무 납작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하루에 불 수 있는 풍선의 개수는 한계가 있으니까 살짝 적당히. 작가님이 찍어준 사진은 맘에 들었고, 다음에 또 그녀를 찾게 된다면 칭찬 폭격이 쏟아지기 전에 아, 저 다 아니까 안 하셔도 돼요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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