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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Nov 06. 2020

저도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어제 퇴근 후 문래로 향했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출간 기념행사가 있었다. 작은 공간에서 열리는 행사인 데다 소식을 제법 뒤늦게 알게 되어, 며칠간 틈틈이 예약 사이트에 접속해 매진 알림만 노려보고 있다가 행사 하루 전에 취소표가 나서 참석할 수 있었다(평소 성격대로 겨우 얻은 표를 취소했다가 다시 예매하긴 했다. 뭐든 결정하기까지 오래 망설이고, 망설인 후에 그 결정을 번복하고, 다시 번복을 후회하는 버릇여지없이 발동했다). 오랜만에 들른 문래는 모든 게 그대로인 듯하면서도 많은 것이 바뀌어있었다. 가느다랗게 흐르면서 이리저리 엉켜있는 골목마다 힙한 카페며 술집,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 동네의 공식인 듯 빛나는 네온사인 아래마다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워낙 길치라 미로 같은 골목 사이를 헤매다 행사에 늦기 싫어, 일찍 도착모임 장소를 미리 가본 다음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물론 이 과정에서도 길을 엄청 헤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카페에선 10분 남짓 머물렀다). 마침내 모임 장소에 도착한 다음에야 나는 아, 하는 심정이 되었는데 삼 년 전 이맘때 와본 곳이었기 때문이다. 취소표가 나기를 기다리며 모임 장소가 어딘지, 회사에서 얼마나 걸리는지 몇 번이나 찾아봤으면서도 내가 이미 아는 곳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때는 남자 친구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인디가수의 공연을 보러 왔었다.


음악을 좋아해서 적지 않은 공연을 보러 다녔던 편이고, 거의 대부분의 공연에는 남자 친구가 (취향을 불문하고) 함께 했는데, 삼 년 전 이곳에 누구의 공연을 보러 왔다는 걸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건 인스타그램 때문이다. 사람마다 연애의 스타일이 다르기에 연애가 끝나면 흔적들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모든 것을 고스란히(심지어 몇 가지는 꽤 소중하게) 보관하는 부류도 있다. 관계야 어찌 됐건 어쨌든 내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함께 해준 사람이고, 그 부분은 분명 여느 시절보다 밝고 아름다웠고 좀 더 자주 웃었을 테니 그 시절을 delete 한 번으로 휘발시켜 버리고 싶진 않은 것이다. 나는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에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며 땅을 보고 걷다가, 어느 하루는 그대로 꼬라져서 손바닥을 가로로 찢고 핸드폰 액정 전체가 박살날 정도로 몸과 마음에 대손상을 입었다(보도블록 위에 온몸으로 大자를 반듯하게 그리며 엎어져있는 나를 지나가던 청년이 흔들었다. "괜찮으세요? 구급차 불러드릴까요!!" 구급차 호출에 돈이 만만찮게 든다는 정보를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어 벌떡 일어났지만). 우리는 헤어졌다. 이유는 없었고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도 카톡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주고받았고 종종 만났고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헤어진 뒤에도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둘만 쓰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수시로 접속해 우리 두 사람이 지나온 시간들을 소상히 살피며 큭큭대거나 눈물을 흘렸다. 그 무렵의 내 일기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마음이야 또 한 번 무너지면 된다."


이별 그 후

남자 친구는 자주 "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라고 다정하게 말해주던 사람이었고, 책을 좋아하고 피아노를 곧잘 치는 데다 목소리가 묵직한, 그러니까 내 이상형의 90% 정도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첫 책을 준비할 때 초고 몇 편을 읽고 "구몬 학습지 같다"라며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날려 나를 각성케 하는 혜안도 갖췄다. 결정을 잘 못하는 나는 남자 친구의 존재가 자뭇 든든할 수밖에 없었고 무슨 일이든 일단 그와 상의를 하려 들었다. 작게는 메뉴 선정부터 크게는 이사에 이르기까지. 헤어지는 것도 상의와 동의, 합의를 거쳤을 정도로 잘 맞는-쓰고 보니 '잘 맞는다'는 표현이 이 문장에 매우 부적합하긴 하지만-커플이었다고 생각한다. 헤어진 뒤에도 애틋하고 텁텁한 마음이 꽤 오래갔고, 너무 힘든 어느 날이면 "오랜만에 연락해서 미안한데, 한 번만 안아줄래?"라는 말을 하고 싶은 때도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안길 수 있는 품이었으니.


그 뒤로 꽤 오래 우리의 인스타 계정을 잊고 지내다가 최근에 새삼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된 건, 평소에 SNS를 잘하지 않는 친구가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인스타 계정이 아닌 커플 인스타 계정을 팔로잉했기 때문이다. 알림을 확인하자마자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 "너 인스타 계정 털린 거 아냐?"라고 물었더니 "이거 너 맞지?"라는 답장이 왔다. "내 인스타 계정은 다른 거야"라고 말하며 대답을 슬쩍 피하곤 그 김에 다시 들어가 보았다. 계절은 3년 전 봄부터 시작해 2년 전 겨울, 또 다른 어느 공연장에서 멈춰있었다. 역시 내가 가자고 그를 잡아끌었던 공연이고 우리는 구석 소파에 앉아 준비된 양갱과 귤을 까먹으며 즐거워했다. 사진 속의 우리는 즐거운 채로 멈춰있다. 그 뒤로 다른 이와 하하호호 마주 보고 밥 먹고 차 마시는 만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남자 친구가 보고 싶고 애틋하고 그리운 것도 아니지만,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이 사람을 왜 좋아했지?"라든가 "이렇게 생겼었나?"라는 물음을 문득 가지게 되지만, 그래도 내가 마음 놓고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현재까지 그 사람과 나 밖에 없어서 조금 난감한 기분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낼 때까지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당연히 엄마가 아닌 남자 친구의 이름을 첫 장에 적어 넣었을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고 싶었으니까.


출간 기념회는 간간이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독자들을 쪼개 보니 편집자, 편집자가 되고 싶은 이, 문학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이, 부산 사는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나는 나를 그냥 회사 다니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한마디로 문학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자리였고, 열심히 쓰는 사람과 열심히 읽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빚어내는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물결 속에 가만히 누워서 물결이 내 머리카락과 귓불과 손가락을 지나 종아리를 감싸는 그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는 기분이었달까. 다들 하는 일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생김이 다르지만, 문학을 사랑한다는 그 마음 하나로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고 었다. 자연히 내가 지난여름, 뭣도 모르고 준비하고 치렀던 출간 기념 낭독회를 떠올렸다. 그 자리가 얼마나 따뜻하고 귀한 것이었는지, 발끝이 가만히 시려오는 공간에 앉아있으니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뭣도 없는 나를 보러 비 오는 평일 저녁에 먼 거리를 걸음 해준(지방에서 온 분들이 몇 분 계셨는데 포항에서 오신 분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얼굴들을 떠올렸다. 참가비에 맞먹는 재료비를 들여 커피와 미니 피자를 준비해주신 사장님의 다정함도 떠올랐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나에게 팬이라며 엽서를 남겨준 어느 분의 마음도 다시금 느껴졌다. 글을 사랑하는 마음, 글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아아, 나도 그런 마음을 가졌구나.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늦은 밤, 전철에서 혼자 벅찼다.


이 마음에 대해 써야지. 자정이 넘어 집으로 돌아와 제목을 메모해두고는 잠에 빠졌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이 마음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쓰지 않고 헤어진 남자 친구를 여전히 구질구질하게 '우리'라는 세트로 묶어 부르며, 그것도 모자라 서당개가 한글을 떼기에 충분하다는 삼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른 뒤 "아, 우리 여기서 함께 시간을 보냈었잖아. 참 아름다웠지"따위의 감상이나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였다면 경악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글에는 의도적으로 거의 등장시키지 않는 소재인 '연인'에 대해 쓰는 이유는 어제의 출간 기념회에서 있었던 담화 때문이다. 이번에 작가가 새로 펴낸 책은 연인들의- 연애 중이거나 이별하려고 하거나 이별했거나 재회했거나- 이야기 모음 집인데, 독자 중의 한 명이 이런 질문을 했다. "요즘 비혼을 결심하는 사람도 많고 비연애주의자도 많다. 연애 소설을 쓰신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냐"라고. 작가의 대답이 대충 이랬다. "문학이 삶의 모든 주제를 다룰 수 있진 않다. 아무래도 연인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그게 문학이 잘 다룰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고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울림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인상 깊은 대답이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웃고 우는, 만남과 이별의 대서사시를 무한 반복하면서도 연애는 계속된다. 권태로운 반복 속에도 분명한 새로움이 있고(먼지 한 톨의 질량이라도 말이다) 그 새로움을 건드리는 게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통상적으로 연애를 앞에서만 봤다면, 문학을 통해 비로소 옆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보고 하는 것이다.


작가의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그동안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나만의 것이라고 철저하게 착각하고 싶어 했던(상대를 향한 이 마음, 이 감정이 언젠가는 휘발되어 버릴 것을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야말로 영원할 것이라며 본인도 믿지 않을 선언을 하는 것처럼. 내 손을 꼭 잡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죽어도 좋겠다"라고 몇 번이나 말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감정들이 작가의 호흡을 타고 냉정하고 적나라하게 나열된 것을 읽으며 아, 하는 심정을 나는 몇 번이나 느껴야 했었나. 나만이 발명해낼 수 있는 나만의 것인 줄 알았는데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모두의 감정이었다는 사실. 흔하고 흔해빠진 걸 그냥 나도 하나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나도 연애를 할 수 있는 거지만. 어쨌거나 문학하는 마음과 누군가를 사랑했었던 마음으로 이 글을 한번 써보았다. 쓰게 됐다, 가 맞는 말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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