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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Nov 13. 2020

A small good thing

12시 30분. 오늘도 일찍 자기는 틀렸다. 이번 주까지는 과제를 완성해 가야 해서 늦게까지 잠 못 들고 한 줄을 썼다 지웠다 하고 있지만,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게 퇴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반듯한 마음으로 앉은 게 아니라 누워서 한 시간 넘게 핸드폰을 보며 이불 위를 뒹굴다 마지못해 일어나 앉은 것이다. 한 줄만 쓰자, 라는 마음으로 노트북 앞에 앉는다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의 말에 따르면 한 줄만 쓰자라는 마음으로 앉아서 한 줄만 쓰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환히 알면서도 얕은 마음으로 속아주는 것이다. 나도 한 줄만 쓰자, 하고 앉은 게 11시쯤인데 주인공 머리를 잘랐다가 색을 바꿨다가 손을 잡았다가 1분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쓸데없는 문장만 보태고 있었다.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쓸데없는 걸 만들 수밖에 없는 사정이 제일 괴롭고, 안 해도 되는 걸 애써 하는 마음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가 제일 어렵다. 애당초 이유가 없는 마음이니 납득시키려야 그럴 수도 없다. 한편으론 이런 나를 내가 충분히 이해한다는 게 야트막한 위로라면 위로다.



과제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고 생일을 주제로 A4 한 장 분량의 소설을 써서 제출하는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알아차릴 때까지 어떻게든 삶의 장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레이먼드 카버가 내 삶에 (노골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브런치 글에 언급한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을 시작으로 막 시작한 소설 수업의 과제로 등장했고, 어제는 온라인 서점 신간 미리보기에까지 등장해 내게 말을 건넸다. 전혀 상관없던 책이었는데 거기에 까지 나타나다니. 레이먼드 카버는 엄청 유명한 작가이긴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기회를 마련하지 않으면 읽을 일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내용을 익히 알고 있기도 했고 마지못한 마음으로 펴 든 것이라 묘사건 장면이건 훌렁훌렁 넘기면서 출근길 전철에서 대충 읽었다. 내용은 이렇다. 엄마가 여덟 살 난 아들의 생일을 위해 케이크를 주문하지만, 생일 아침 아이는 뺑소니를 당하고 의식불명에 빠진다. 제과점에서는 케이크를 찾아가라며 자꾸 전화가 오고 며칠 지나 아이는 죽는다. 아이가 죽은 날, 부부는 제과점에 들러 케이크에 대해 이야기하고 빵집 주인은 이거라도 먹으라며 따뜻한 빵을 내민다. 작품의 원제 <A small good thing>이 가리키는 것처럼,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 앞에서 기껏 빵한쪼가리가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싶지만 며칠을 잠 못 이루고 굶다시피 한 부부는 오랜만에 빵을 실컷 먹으며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 건조하다 못해 삭막하게까지 느껴지는 작가의 문체 때문인지 별 것 아닌 것이 지닌 사소한 온기를 아주 확실하게 가늠할 수 있다.


A small

회사에서 전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좋아하는 비건 식당이 있는데 번번이 먹고 싶어 하면서도 지난여름에 겨우 한번 간 뒤로 줄곧 가지를 못했다. 내일은 꼭 가야지 벼르다가도 막상 퇴근을 하면 피자 한두 조각 먹자고 그곳까지 부러 가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고, 얼른 집에 가서 모로 누워 핸드폰이나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어제도 그랬다. 식당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내내 망설였고 도착해서는 평소 좋아하는 구석 자리가 아닌 애매한 중간자리인 게 맘에 걸렸다. 어차피 한두 조각 먹고 말거라 금방 일어나겠지만, 테이블 간의 간격이 좁아 바로 옆 테이블의 말소리가 다 들린다는 것도 불편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막상 뭘 먹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다 인기 메뉴라는 피자를 골랐는데 결과적으론 실망스러웠다. 평소에 먹던걸 먹을걸 하는 후회와 함께 두 조각 정도 먹다가 남은 걸 포장했다. 헛헛한 기분으로 전철역까지 걸었다. 축축한 밤공기가 낙엽과 함께 뒹굴고 있었다. 잠깐 마스크를 빼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오랜만에 나를 위하는 행위를 해보고 싶었는데 쩝. 역시 집으로 얼른 돌아가 모로 누워 핸드폰을 보는 게 낫지 않았나. 언젠가 사촌동생이 "누나는 대체 무슨 낙으로 살아?"(사촌동생뿐만 아니라 나를 좀 안다 싶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게 듣는 질문이다)라고 물었던 기억을 곱씹으며 이렇게 밋밋하게 살아서야 되겠나, 나는 정말로 사는 낙이 없는 사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봤다(사는 낙 리스트 추천 부탁드립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눕고 겨우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고 눕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전철문이 열리고 닫힌다는 기계음이 아닌, 오랜만에 듣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오늘도 수고했다고, 가을이 가고 있다고, 남은 하루가 편안했으면 한다고. 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옆에 앉은 남자는 연신 욕을 하고 있고, 그 옆에 앉은 여자는 손톱으로 톡톡톡톡 핸드폰을 두드리며 화면을 누르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포장해온 피자를 냉장고에 넣고 이불 위에 털썩 몸을 뉘었다. 어디 사는 낙 좀 구경해볼까. 핸드폰으로 유튜브 몇 개를 봤다. 다들 뭐가 그렇게 웃기고 즐거울까. 핸드폰 속의 사람들이 깔깔깔깔 웃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는데 시간은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아이고, 한 문장만 쓰자. 정말로.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단어 하나를 가지고 끙끙대다가 거 참 일찍 잠이나 잘 것이지.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일을 하고 있다니 라는 통렬한 깨달음이 왔다.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이렇게 낑낑댄다고 누가 알아주며(알아달라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무엇을 위해(목적 없이 하는 일이 의외로 가장 오래 할 수 있지만) 이러고 있는 건지.


good thing

내 삶의 축이 죽음 쪽으로 자꾸만 기울었던 시간이 있다. 짐짓 너스레를 떨었지만 예민한 누군가가 희미한 낌새를 알아채고 "죽지 마세요"라는 말을 건네기도 하던 날들이었다. 자꾸만 기우뚱하는 나를 붙들고 어느 날 선배가 화를 냈다.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아팠으며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니 너도 견뎌야 한다는 함의가 깃든 말이었다. 내게 글을 써보라고 말해준 사람, 시와 문학을 아낌없이 베풀던 사람이었다. 나는 선배가 왜 차를 몰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하고, 끝내 무엇을 견디지 못했는지 깊은 물처럼 알 도리가 없지만 그가 남긴 말을 딛고 살아남았다. 여기저기 써댔다. 블로그에, 페이스북에, 인스타그램에, 일기장에,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작가가 되고 싶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지금은 생각하지만, 그때는 견디기 위해 썼다. 내가 그동안 쓴 산발적인 문장들을 그러모아 제목을 달아준다면 <견딜 수 없는 인생의 순간들>이 될 테고, 여전히 나는 삶을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무엇이든 쓴다. 퇴사하고 싶다고 쓰고 과장님이 밉다고 쓰고 잘 쓰고 싶다고 쓰고 울적하다고 쓰고 울적한 얘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쓰고 여전히 미안한 마음에 밝은 척하며 웃긴 이야기도 쓴다. 예전과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잘 쓰고 싶다는 (득실득실한) 바람이 깃든 정도. 내가 삶을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며칠 전 친구가 "요즘 글을 많이 쓰는데 회사 그만둔 거니?"하고 물어왔을 때야 웃음을 터트리며 인지했다. 나 요즘 많이 힘들구나. 별 볼일 없는 한 문장이라도 써야 별 볼일 없는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라도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는 조금 더 잘 쓰겠지. 잘 썼으면 좋겠다. 별 볼일 없지만 내겐 퍽 위안이 되는 사실이다. 오늘보다 내일 더 잘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레이먼드 카버가 내 삶에 왜 등장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삶은 내게 필요한 걸 준다고 믿기 때문에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오늘 쓴 글처럼 내 삶에서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찾아보라는 메시지 일 수도 있고, 외국 문학은 도통 읽으려 들질 않으니 이참에 공부 좀 하라는 뜻일 수도 있겠고, 내가 미처 생각할 수도 없는 깊고 거대한 이유가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 뭐 사실 이유가 없을 수도 있고 그러면 또 어떠냐 싶은 마음도 든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오늘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2시 30분이었고, 퇴근 후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은 오늘이 얼마 남지 않은 10시 50분이다. 전 직장 동료들이 술을 먹자고 불렀지만 나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쓴다. 무려 금요일 밤인데 말이다. 남들처럼 사는 낙을 좀 다양화해봐야겠다는 척을 하지만 실은 되려 생활을 더욱 단순하게 하고 싶은 바람이 크다. 이 글을 마치면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새로 산 책을(거의 매일 새로 사지만) 읽다가 잠들 것이다. 내일 드디어 수업에서 내가 쓴 소설을 발표(?)하게 되는데,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찢기더라도 일단은 떨린다. 내 삶의 낙은 고작 이런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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