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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Nov 17. 2020

그저 반대방향으로 걸었을 뿐인데


그저 반대방향으로 걸었을 뿐인데 

지난 토요일, 소설 수업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날이 좋았다. 보통 수업을 마치면 신촌역 방향으로 걸어가 근처 중고서점에서 강사님이 수업시간에 언급한 책을 찾아보거나 스타벅스 매장 두 어군데를 돌며 빈자리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편인데, 그날은 잠깐 가만히 서있었다. 신촌역으로 걷기엔 반대편에 흐드러진 은행나무가 너무 예뻤다. 은행나무가 이렇게 예쁜데 오늘은 저쪽으로 한번 걸어보자 싶었고, 걷기 시작한 지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타벅스가 나타났다. 당황했다. 분위기도 맘에 들고 자리도 여유 있었다(아 그토록 찾아 헤맨 나의 이상형!).  5분 정도 걷다가 발견했다면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뿌듯해했을 텐데 너무 순식간에 원하는 게 나타나버리다니. 핫초코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있으그동안 신촌역 근처를 헤매며 카페 빈자리를 찾아 눈물겨운 싸움을 했던 지난날들이 아른거렸고, 지난날들의 잔상을 밀어내고 쇼케이스에 딱 하나남은 치즈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핫초코에 치즈케이크까지 먹으면 (몇 년째 떠들고만 있는) 다이어트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손은 눈보다 빠른 법. 어느새 눈앞에 놓인 치즈케이크를 포크로 야금야금 잘라먹으면서, 목이 메면 간간이 핫초코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행복하다. 그것도 몹시. 가본 적 없지만 뉴욕 맨해튼의 어느 비싸고 고급진 레스토랑에 앉아 창 밖으로 펼쳐지는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핫초코를 음미하는 것도 아니고, 입에 넣으면 한 달 묵은 양말을 삼킨 것 같은 시큼하고 꼬릿한 풍미를 그대로 구현해내는 고급 치즈케이크를 먹는 것도 아닌데. 그냥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운 좋게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는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밥 대신 퍼먹고 있을 뿐이면서. 나라는 사람의 행복 가성비는 누구보다 저렴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기분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수업에서 강사님이 읽어보라고 권한 단편의 앞 몇 문장만 읽는 둥 마는 둥 하다 지금 느끼는 이 기분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행복을 발견하고

소설은 장면의 미학이다.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가기 때문에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응당 그렇겠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하는 합당한 논리가 전제된다. 그렇지만 자기가 쓴 글에 대해서는 마음이 안으로 굽기 마련이고(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쓰다 보면 논리의 잣대가 나도 모르게 휘어지고 나의 세에서만 통용되는 논리가 만들어지기 쉽다. 예를 들면, 시종일관 조용하고 다정한 성품의 주인공이 갑자기 차를 멈추고 동승자를 자동차 밖으로 끌어내린다거나 회사 잘 다니던 누군가가 갑자기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집 안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다. 쓰는 입장에서는 분명 주인공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보여주지만 않았을 뿐 작가는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 좋은 소설은 장면들이 물처럼 흐른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이 촘촘해 장하나를 밀었을 때 다음 장면들도 도미노처럼 촤르르륵 쓰러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소설은 장면 하나하나를 일일이 힘을 주어 밀어야 한다. 예를 들면

장면 1) 철수가 영희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장면 2) 영희는 철수가 며칠 전 순이랑 데이트하는 걸 봤다.

장면 3) 영희는 철수의 뺨을 때렸다(격한 영희)

2)가 있으면 1)과 3)의 연결이 자연스럽지만, 2)가 빠지면 독자 입장에서는 영희의 인성이 심히 걱정되는 것이다.


카페에 앉아 이토록 사소한 것에 이토록 좋아지는 기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결과, 정답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 생활에 대해 '행복'이라는 엔딩을 이미 만들어놓고 왜 행복하지를 않냐고, 왜 기분이 늘 우울하냐고 주인공인 나를 다그치면서 장면 하나하나를 힘주어 밀고 있었다. 만원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는 출근길이 행복할리 없고, 업무 때문에 바쁠 때는 음악을 듣고 싶어도 이어폰 꺼내는 시간조차 아까워 주저하면서 무려 행복하라니. 주인공이 행복하려면 장면마다 주인공이 좋아하는 것들을 심어놓아야 하, 그런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니까 나는 행복했던 것뿐이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운 좋게 카페를 찾고 좋아하는 음료와 케이크를 먹으면서 친구에게 전화도 한통 하고(받지 않았지만). 행복한 장면을 이렇게 촘촘하게 설계했는데 주인공이 기분이 울적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기분 좋은걸 촘촘히 심어놔야 기분이 좋다는 그 사실을 카페에서 깨닫고 잠시 멍해졌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내가 왜 몰랐지? 좋은 기분, 명랑한 상태는 개인의 의지로만 되는 게 아닌데.


인생을  만듭니다

카페에서 나와 영화를 보러 갔다. 좋아하는 것들을 장면마다 심은 김에 어디 한번 계속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에겐 늘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지만, 결국엔 그마저 좋은 장면으로 만들어주는 멋진 친구들이 있다. 주인공이 옴짝달싹 못하고 한 장면에 갇혀있을 때마다 친구들이 손을 뻗어 다음 장면으로 데려간다. 소설을 쓸 때도 좋은 장면을 만들어주는 도움의 손길이 있다. 다른 사람이다. 좋은 소설(뿐만 아니라 모든 글)을 쓰려면 자기가 쓴 글을 남에게 보여주는 과정이 필요한데,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냉큼 잡아채 줄 남들의 무덤덤하고 때론 서늘한 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안으로 굽는 마음으로 쓴 글을 반듯한 남의 시선으로 읽다 보면 이게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보다 자세히 보인다(이렇게 합평의 필요성에 대해 길게 말하면서도 일주일 내내 준비한 A4 한 장을 결국 모두의 앞에 꺼내지 못했다). 조언에 따라 장면을 더하기도 하고 과감하게 삭제하기도 하면서 좋은 소설을 만들어나간다. 어느 행위에서든 인생을 발견하고 배울 수 있지만,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인생과 정말로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소설도 안 써봤지만) 자주 한다. 아주 빈약하고 어설픈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살을 더하며 뭔가를 완성해가는 일. 그동안 해왔던 것을 다 갈아엎기도 하고,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뭔가가 번쩍 떠오르기도 하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때도 있고, 오늘은 망했다며 포기하려다가도 자기도 모르게 쭉쭉 써나갈 수 있는 보통의 무수한 날들을 통과하며 뭔가를 만드는 것. 보다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할 때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요즘 새로 생긴 내 꿈은 소설 한 편을 쓰는 것이다. 한 문장 쓰는데 두 시간 걸렸다는 어느 소설가의 SNS를 보고 아득한 마음에 한숨부터 나오고, 옆자리 과장님에 "돈도 못 벌고 고생만 하는데 왜 해요"라는 답을 지만.


장면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김연수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토할 때까지') 쓰고 지우는 것. 무언가를 잘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는 것. 정말 미련스러워서 미련함이 대단해 보일 정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 나는 어쩌면 그런 사람이 되고 싶나 보다. 마다 행복해질 수 있는 요소를 촘촘하게 부지런히 심으면서, 그런 과정을 행복하게 겪어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영화 속 주인공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아임 타이니 타이니 펄슨, 벗 위 아 그레이트." 나는 작고 작은 행인 1이지만, 내 글을 읽어주는 들 덕분에 오늘도 그레이트를 향해 나아간다. 닿지 못한다 해도 내 목적지는 그레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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