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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Nov 25. 2020

오디너리 라이프


대학

태국 여행 중이었다. 기껏 시간과 돈 들여온 타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을 썩 반가워하지 않아서, 일부러 영어로만 안내되는 게스트 하우스를 골라 묵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허연 애들이 밤낮 술 마시며 뒤엉키고 떠드는 가운데, 그들과 따로 떨어져 늘 홀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남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이의 안정감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살포시 풍기는 이였다. 나도 혼자 숙소에 머무는 날이 많았으므로, 자연스레 그와 자주 마주쳤고 간간이 이야기를 나눴다. 로맨스의 시작인가! 그렇지만 그는 놀랍게도 열아홉 살이었고 대학 가기 전에 1년 정도 쉬면서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대학 가기 전에 1년을 쉰다고? 그건 '꿇는'거잖아. 이미 그는 충분히 그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되는 건가 싶었고, 왜 나는 대학 가기 전에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해봤을까 싶었다. 그땐 이미 대학을 졸업한 시점이었지만, 분하고 부럽고 서러웠다. 그런 인사이트는 한 개인의 훌륭함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엄마한테 수능 마치고 1년 쉬면서 여행 좀 하고 오겠다고 했으면, 분명 미쳤냐는 소리를 들었을 거다. 고3 시절, 야자 중에 찌뿌듯한 몸으로 뱅글뱅글 돌던 운동장 한편에는 급식실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계단을 '재수 계단'이라고 불렀다. 그 계단에 서있는데 누가 이름을 부르면 재수 없게 재수를 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재수를 하는 건 재수가 없는 거였다. 재수하는 게 인생의 낙오자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지나고 나면 정말 별것도 아닌데, 어른이 되어보면 1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데, 그때는 1년이 마치 그 후의 내 인생을 통째로 삼킬 것처럼 벌벌 떨었다. 환경이, 사회가, 국가가 그런 식으로 굴러갔다. 그런 환경에서 어느 누가 "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으니 1년 여행 좀 갔다 올게."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 나라에서는 바로 대학을 가지 않거나 대학을 안 가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열아홉 살인데도 서른 후반의 아우라를 풍길 수 있는 이유도, 좋은 인프라의 덕을 조금은 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해서 충분히 시간을 들여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십 대는, 초시계를 책상에 놓고 한 문제당 1분 컷을 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경쟁하며 지나온 나의 십 대와는 다를 테니까. 대화를 이어갈수록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짓눌려 내 방으로 터벅터벅 돌아온 날이 기억난다. 나도 수능 후에 1년만 쉴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괜한 미련이지만.


결혼

생판 얼굴도 모르는 엄마 친구 딸-엄마 친구 얼굴도 모른다- 결혼식에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남도 보고 너도 보겠다'는 엄마의 바람 때문이었다. 신부 측에서 마련한 대절버스를 타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된 엄마는, 올라온 김에 서울 사는 딸내미도 보고 결혼식 뷔페도 먹일 심산으로 결혼식장에 나를 불렀다. 얼굴도 모르는 남의 결혼식에 기어이 가야 하느냐는 나의 물음을 엄마는 "너는 엄마가 보고 싶지도 않니?"라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식장에 도착하니 엄마와 엄마 친구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내 나이를 물었고 매우 자연스럽다는 수순으로 남자 친구 여부를 물었고(무례하다) 신부와 나이가 동갑인데 너도 빨리 가야 하지 않느냐며 채근했다(무례하다). 또 시작이군. 적당히 맞춰드리며 웃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긴 주례사를 시작으로 식이 끝나고 엄마 친구들과 식당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마주 보고 밥이나 먹자는 거였지, 자리 잡았으니 제대로 해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귀에 피가 난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렇게 고르다가는 시집 못 가니 적당히 골라라, 앞으로도 잘 나갈 것 같겠지만 그러다가 훅 간다, 요리를 배운다고 들었는데 신부수업도 다 된 거 아니냐, 애를 낳으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라...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나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를 못해서 안달 일지 조용히 생각했다. 나를 아껴서 하는 말이면 기꺼이 듣겠지만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인 데다 앞으로도 볼 일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 같았다(실은 한 손도 많다). 마음 같아서는 고요히 일어나고 싶었지만, 엄마 체면도 있고 해서 그대로 꾹 앉아있었다. 심지어 몇 가지 음식은 가져다 드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은 멈출 줄 몰랐다. 인내가 극에 달한 나는 진심을 토로하고 말았다.

"꼭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 안 하는데요."

아니, 얘 봐라. 우리 딸도 결혼 안 한다고 안 한다고 하다가 결국 내년에 간다, 남들 다 하는 건 해봐야지 왜 안 한다고 하냐... 귀에서 피가 흘러 먼저 일어나려는 나를, 그들은 끝내 주저앉히고 결혼하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무례보다 한 단계 높은 무례를 뭐라고 하더라.


인생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음으로 20분 정도가 걸렸다. 집에서 나와서 10분 정도 걸으면, 같은 반 친구의 집 앞을 지나게 됐는데 그때쯤 대문을 열고 친구가 나오곤 했다. 같이 학교까지 걸어가거나 혹은 나보다 몇 걸음 앞선, 책가방 멘 친구의 등을 보면서 걸었다. 매일 아침, 친구와 함께 학교로 걸어가니 반가웠겠다고? 아니, 나는 매일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건 불공평하다'라고. 친구는 나보다 학교에 가까이 산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나보다 늦은 시간에 나와도 학교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목적지는 같은데 나만 더 노력해야 했다. 초등학생인데 애가 벌써부터 꼬여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같은 출발선이 굉장히 중요했다. 나는 벌써 많이 걸어왔는데, 그제야 집에서 나오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 배알이 꼴렸다. 저마다의 인생은 결코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어릴 때 알았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을 거치고 직장인까지 되고 나서, 그러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겨우 알았던 것은 저마다의 인생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되지 않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지도 않다는 거다. 난 그걸 정말 늦게 알았다. 대학 졸업을 목전에 두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인생에 대해 꽤 호기로웠다. 계획대로 착착 블록을 쌓았고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유학을 다녀오면 자격증을 따고 조기졸업을 할 생각이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지만, 남들 다 회사에 가니까 나도 으레 그러려니 생각했다. 남들과 같은 목적지를 원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남들과 같은 목적지에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는 절망했다. 나는 왜 평범하지 않을까, 수많은 밤을 자책했다. 죽도록 평범을 갈망했던 시기가 있었다. 평범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다름들이 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친구 한 명이 몇 년간 일을 쉬다가 최근에 대학에 다시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그렇게 듣기 싫어했던 "취직은? 경력은? 결혼은?" 이런 질문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뭐가 걱정됐던 걸까. 인생을 마음대로 사는 친구가 걱정됐던 걸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내가 걱정됐던 걸까. '글을 쓰기 위해서 일을 그만두고 일을 구해야 했다'는 아이러니한 어느 책 속의 문장을 내 삶으로 가져와야 하는데, 어쩌면 진즉에 가져왔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 문장을 책 속에 두고만 있지 않나. 기성작가들이 하루에 (최소)네 시간을 쓴다는데, 나는 그러면 몇 시간을 더 써야 하나. 퇴근을 하면 노트북을 끼고 카페로 달려가 뭐라도 써야 하는데, 지난 며칠 동안 쓰기 싫다는 마음으로 비비적거리다가 모처럼 오늘같이 일찍 퇴근한 날은 정말로 써야 하는데, 허기지고 지쳐서 와구와구 빵을 먹고 바로 누웠다가 결국 체해서 잠 못 들고 앉아있다. 뭐라도 써야 하는데 빚을 진 기분으로 쓰기 싫다, 라는 문장만 겨우 한 줄 적고는 결국 예전에 써둔 글을 뒤적이다 살을 붙여 쓰고 있다(대학, 결혼, 취직은 모두 작년 12월에 쓴 글입니다). 묶어서 책으로 만들어 볼 수 있을까 싶어 그러모으고 있는 원고에는 결국 느낌표까지 붙인 '엉성함!'이라는 감상평을 달아두고 덮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훈수를 듣는다. 지난 일요일에는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와 "내년에는 결혼하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오늘은 친구 하나가 "좀 즐기면서 살라"는 충고를 했다. 그뿐인가, 애 낳은 친구는 "애를 낳아야 작가로서 경험도 풍부해지고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며 조언하고, 엄마는 "(나는 이미 충분히 평범하지만)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토로한다. 1년에 한두 번 보는 외할아버지는-나를 법대에 보낸 뒤 공무원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지만, 어버이날 다들 모인 자리에서 믿었던 손녀딸이 "나는 공무원이 싫어요!"라는 말과 함께 식당을 뛰쳐나간 뒤 사이가 더욱 어색해졌다- 연락도 안 하고, 공무원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언제까지 그렇게 의미 없이 살 거냐?"라고 하신다. 새겨듣자니 피곤하고 흘려듣자니 내가 정말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나 싶어 스스로에 대해 염려스럽다. 누군가가 내게 인생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가까스로 한 문장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실은 내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다. 뭘 하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대학을 가든 가지 않든,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직장을 그만두든 두지 않든, 글을 쓰든 쓰지 않든 행복한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고. 나를 기만하지 않는 투명한, 용기 있는 선택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선택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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