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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Nov 26. 2020

보일러를 계속 켜 둘 필요는 없지만

까만 옷이 접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며 고요한 어둠을 향해 인사를 하는데 느낌이 뭔가 달랐다. 평소와 달리 훈훈한 온기가 감돈다. 아뿔싸. 보일러를 켜고 갔구나. 자취생의 3대 죄악 중 하나이거늘! 서둘러 보일러를 끄며 애꿎게 날려버린 가스비를 떠올리니 씁쓸해졌다. 주인 없는 빈집에서 열예닐곱 시간을 착실히 돌아간 보일러 덕분에 스위치를 서둘러 끄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따뜻했다. 방바닥의 훈훈한 온기를 손으로 짚다.


출근하자마자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보도자료를 쓰고 업체에 연락해 송출하고 원고를 수정하고 교정을 보고 마감을 하고 인쇄소에 파일을 넘기고 최종본을 검수하고, 이 와중에 사람들의 감정싸움에까지 부대껴야 하는 촉박한 하루를 허겁지겁 삼키면서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누군가의 생일이었다. 지난여름 바짝 가깝게 지내다 계절이 물러감과 동시에, 그러니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출근길 아침에 문득 살갗에 닿는 공기의 선연함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연락이 뚝 끊긴 이의 생일이었다. 무감한 척 하지만 사람들을 둘러싼 작은 것들을 일일이 알아채고 기억하는 나는, 한때 우리가 너무 가깝게 지내며 하루에 한 시간씩 전화통화를 할 때만 해도 약속처럼 다가올 이 친구의 생일을 당연히 축하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것에 대해 필요나 타이밍 정도로 간략하게 일축하던 이라-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우리가 연락을 안 하게 되면'이라는 말을 수시로 입에 올리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편으론 참 서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서늘함은 먼 계절의 일일 거라고, 나에게는 아주 늦게 찾아올, 혹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계절이라고 마음 한 구석에선 그렇게 단단히 믿었던 것 같다. 우리는 돈독한 시간과 깊이를 더해가며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말이다. 서늘한 계절이 예고 없이 나에게 문득 도착했을 때, 나는 추위를 가려줄 무언가를 서둘러 꺼내 입기보다는 살갗에 닿는 온도차를 느껴보려고 했다. 그가 자주 입에 올리던 사람 사이의 거리라던가 타이밍 같은 말을 복기하면서 아, 나는 이렇게나 여전히 촌스럽구나 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갑자기 문득 멀고, 한때 애를 써서 만들었던 타이밍을 위해 더 이상은 노력하지 않는다. 자연히 그렇게 된 일인데 하염없이 마음이 서늘했던 것 같다. 처음이 아닌데도, 한두 번이 아닌데도, 마치 처음 맞는 계절을 대하는 것처럼.


세연과 진경은 이제 더 이상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회색 노트에 둘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 넣고, 여기에 번갈아서 일기를 쓰자, 말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진경은 세연과 무언가 공유할 만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했을까? 그들 사이에 공통점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윤이형, <붕대 감기> 중

사람과 사람의 처음을 떠올려보면 무안할 정도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유독 어릴 때는 관계의 시작이 부단히궁금했던 것 같다. '베스트 프렌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만 차지하고 싶을 정도로 아꼈던 친구를 떠올려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어떤 이유로 친해졌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자기 전까지 얼굴을 떠올리고, 내 모든 것을 내줄 수 있을 정도로 아끼는 사람들과의 시작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게 속상하고 이상하기도 해서, 때론 참다못해 친구에게 묻기까지 했다. 다음에 누군가와 친해지면 꼭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정신은 차려보면 소중한 마음만 덩그러니 있을 뿐 시작을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냥 그 사람이 좋아서, 친해지고 싶어서 아니 그런 마음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냥 소중한 관계가 되어 버리곤 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좀 달랐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가 문득 소중해진다는 건 어린 날과 비슷해 보였지만, 소중한 관계(라고 믿었던 사이)쉽사리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가 되어버리곤 했다. 그럴 때면 시작을 떠올릴 수 없어 겸연쩍은 마음만큼이나 쓸쓸하고 서늘해졌다. 어른은 이런 거구나. 이미 보일러는 꺼졌는데 내게만 뭉근한 잔열이 남아있었다. 내가 뭘 잘 못했나 싶어 그간 나눈 순간들을 복기하며 화살표를 내게 겨눠보기도 했다. 보일러가 꺼진 건 혹여 내 탓일 수 있 싶어 보일러를 켜보려고 애꿎게 노력한 적도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보일러가 윙윙 돌아던 것처럼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보일러가 꺼졌을 뿐인데. 잘 돌아가던 보일러가 어느 순간 작동을 멈출 때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바뀐 지 십 년도 넘은 내 핸드폰 번호를 탓하며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되느냐고 장황설을 늘어놓다 청첩장을 문득 내밀 때, 나의 요청엔 묵묵부답이다가 저 필요할 때만 연락 와서 앓는 소리를 할 때, 언제부터 나와 그렇게 무람한 사이였다고 새벽 두 시에 혀 꼬부라진 소리로 전화를 걸어올 때 생각했다. 아, 그냥 그런가 보다. 앞으로는 나도 그냥 그런 사람으로 대하면 되겠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라고 다정하게 말하고 언제를 정해두지 않으면 되겠다. 물론 내가 아직도 베프를 찾아 헤매고 절절 끓는 마음으로 너와 나의 뜨거운 우정을 맹세하고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 건 아니다. 다들 바쁘잖은가. 다만 일 년에 기껏해야 한번 보더라도, 설령 보지 못하고 해를 넘겨 이삼 년 만에 겨우 만나더라도 여전히 반가운 사이를 원한다. 자주 보면서 돈독한 사이를 만드는 건 쉽지만,  자주 보지 않으면서 온기가 오래도록 가길 바라는 이 마음이 욕심이란 것도 안다.

오늘자 페이스북에 알람이 떴다. 2002년에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찍을 장소가 퍽이나 마뜩잖았는지 엘피지 가스실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인물들 중 유독 살갑던 친구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아직까지 저 사진에 있는 모두랑 연락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하네 ^^"라는 답장이 왔다. 그래, 신기한 일이다. 20년 전의 사진이고 우리 모두는 몇 년이 무색하게 보지 못하지만, 가끔 떠올리면 기분 좋은 웃음이 따라오는 고마운 얼굴들이다. 야트막한 온기가 오래도록 가길 바라는 이 마음이 욕심이지만, 그래도 다행히 욕심을 부리며 살고 있다. 자주 보지 않아도 다정하고 편안한 관계들이 내겐 있다. 바쁘고 동동거리느라 진즉에 꺼졌을 보일러를, 나 대신 말없이 돌보고 보듬어주는 마음들에 가만히 기댈 뿐이다.


뒤늦게 고백하자면 그날, 그러니까 자신의 생일날 친구가 연락을 해왔었다. 생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이야기였고 나는 짧은 대답으로 의견을 전했다. 덧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생일 축하한다고, 너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어쩌면 그 친구가 허물없이 "있잖아, 오늘 내 생일인데"하고 넌지시 한 마디를 가볍게 하기를 내심 기다렸을 수도 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건네기 힘든 사이가 되어버렸네, 생각하면서 아직 따뜻한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곧 사라질 이 온기가 부디 오래도록 가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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