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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Nov 29. 2020

당신은 기능하는 인간입니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크림을 다 썼다 싶더니 치약도 춤하게 똑 떨어졌다. 면봉도 사야 하는데. 인간이 살아가는데 뭐 이리 많은 것들이 필요한가 싶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걸 꼽아본다면 이런 것들. 손톱깎이, 빗, 비누, 안경, 우산. 동물들은 크림도, 손톱깎이도, 비누도 필요하지 않은데 어떻게 인간만은 이 많은 것들이 필요한 건지. 인간이 평생 살아가는 데 사용하는 물품의 평균 가짓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많은 필요를 일일이 채우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돈 벌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잠에서 깨어나니 벌레가 되어버린 어느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온 그가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어버린 뒤로 식구들에게 기묘한 변화가 생긴다. 늘 안락의자에 파묻힌 채로 골골거리던 아버지는 일을 구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생기가 넘치는 눈과 꼿꼿이 세운 허리, 집안에서도 직장에서 입는 번쩍거리는 제복을 차려입을 정도로 일하는 자신에 대해 과시하는 태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들어앉아서 기껏해야 울 줄 밖에 모르는 여동생도 취업에 필요한 공부를 시작하고, 어머니와 함께 삯바느질을 한다. 벌레로 변한 그는 처음에는 (곧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가족들의 희망에) 어느 정도는 그들의 일원으로 여겨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가족들의 냉대를 견디다 결국 죽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를 향한 냉대와 멸시로 보이지만, 오로지 식구들의 경제적 수단으로만 존재하던 남자가 이용 가치가 없어지니 결국 거세당한 것이다. 뒷맛이 씁쓸한 이야기다.  


평생 살아가는데 그토록 많은 물건들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 가치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물건을 마련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도 같다. 꼭 필요한 물건을 마련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굳이 없어도 되는 물건까지 마련할 수 있다면, 심지어 그런 물건들이 주위에 넘쳐난다면 그는 꽤 괜찮은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한 켤레 2만 원짜리 운동화보다는 20만 원짜리 운동화를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배 정도 괜찮아 보이고, 20만 원이 아니라 200만 원짜리 운동화를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는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항변을 마음속으로 고요히 해보지만 잘 차려입은 옷에, 들고 있는 가방에 눈길이 한번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모두 돈이 만들어준 존엄이다. 남자는 왜 하필 '흉측한' 벌레로 변했을까? 돈을 벌지 못하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사회적 시선인 동시에,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나는 스스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까. 흉측한 벌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심하고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마음에 자주 빠지지 않을까. 돈과 자존감 사이에 등호를 놓을 순 없지만 등호를 완전히 치워버리기도 참 애매한 노릇이다.


글쓰기

요즘의 내게 제일 필요한 건 글 쓰는 시간이다. 벌레로 변한 남자의 방에서 가족들이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을 치워버릴 때 그가 끝까지 사수하려고 했던 액자처럼 - 벌레로 변한 그는 기어 다니기 쉽도록 온 방이 텅 비어버리기를 바라는 한편, 물건이 치워지면 인간으로서의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될까 봐 걱정한다-  하루 중 대부분을 돈벌이에 할애하고 있는 나는 글 쓰는 자아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될까 봐 두렵다. 운 좋게 출근길 전철에 자리가 나면 앉아서 핸드폰으로 한 줄을 쓰고, 때론 점심시간에 밥을 안 먹고 쓰기도 한다. 출간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 아니다. 글 쓰는 법을 잊을까 봐 간신히 쓰는 것이다. 삼일에 한편이라는 규칙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지키지 못할 때도 많다. 하루에 한편을 못 쓴다는 사실이 괴롭고 글 쓰는 자아가 있다는 사실이 괴롭다. 쓰고 싶어 하기 때문에, 쓰기 때문에 괴롭지만 이 괴로움이 쓰기의 동력이 된다는 사실도 참 아이러니하다. 요리를 낼 때는 양껏 담지 않고 아쉽게 모자란 듯 담아야 먹는 사람이 그 맛을 오래 기억한다고 하는 것처럼, 늘 아쉽고 부족하니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시들지 않는 것이다.


글을 써야 한다는 부채감을 심하게 느끼는 날에는 앞으로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글쓰기를 그만두더라도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나 스스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지 무섭다.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는 인간, 쓸모없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여기게 될까. 아무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지만 나 자신이 나를 흉측한 벌레처럼 여기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면 무섭다. 돈에 많은 힘을 부여하니 인간 사회에서는 돈을 벌지 않는 인간이 흉측한 벌레로 여겨지는 것처럼, 나의 세계에서는 글에 많은 힘을 부여하고 있어서 글을 쓰지 않는 자아가 흉물스럽게 여겨지는 거구나. 나는 나를 미워하는구나.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온 내가 지친 몸을 이불 위에 누이고 유튜브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시간에 글을 써야지 쓸데없이 뭘 하는 짓이냐고 나를 몰아세우는 목소리가 들린다.'좋아하는 일'이라는 오아시스를 갈구하던 때가 있었다. 찾기만 하면 영문모를 내면의 공허함과 갈급함이 해소될 거라 굳게 믿었다. 그땐 '좋아하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무엇인 줄 알았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지금에야 좋아하는 일은 해도 괴롭고 안 하면 더 괴로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뿐이다. 이런 괴로운 마음으로 계속 써도 될까마는, 괴롭기 때문에 비로소 쓸 수 있고 그 속에서 행복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음을 느낄 뿐이다.


앞으로 돈을 벌어다주지 못하는 남자에게 가족들이 전과 같이 따뜻한 연민의 시선을 베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가족들이 그동안 온 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해온 그의 노고에 감사하며 그를 사랑으로 대해준다면 그는 벌레의 모습을 한 스스로에게 적응하면서 나름의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 않았을까. 죽기 직전까지 여동생의 대학원 학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지 않고 존재하는 자아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카프카가 남긴 유명한 말을 곱씹어본다. <변신>은 처음에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인간을 향한 사회적 거세라고 읽혔지만, 이 글을 쓰며 남자를 향한 냉담한 그 시선이 내게도 있음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혐오가 여러 타자를 거쳐 나에게까지 닿아있음을 느낀다. 글쓰기가 타인을 비롯해 나 자신을 향한 냉대와 혐오를 깨트리는 행위가 되기를, 그래야만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기능하는 인간이 아닌 그저 존재하는 인간으로.  


(+) 가능하면 점심시간에 책을 읽는다. 그런 나를 보고 과장님이 "남의 소설이나 수필 읽을 때가 아니고 업무에 도움이 되는 책을 보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묘하게 상처가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말에 상처를 받은 내가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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