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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Dec 12. 2020

[한 장 소설] 소리

집 앞에서 두 시간째 덜덜 떨며 서 있었던 참이었다. 삼 년 넘게 살며 한 번도 바꾼 적 없던 도어록 비밀번호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겨울의 밤공기는 분 단위로 빠르게 얼어붙었다. 연신 키패드를 눌러댄 탓에 날카로운 경보음이 얼어붙은 공기를 깨뜨릴 듯 울렸고, 옆 호실 문이 덜컥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온기와 옅은 맥주 냄새가 새어 나왔다. 몇 달 전 이사 왔다는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비밀번호를 잊어서요. 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저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괜찮으면 이리 들어와서 몸 좀 녹이세요”라고 말했다. 너무 추웠기 때문에 사양할 겨를도 없이 그의 으로 들어갔다. 내 방과 구조가 같은데도 전혀 다른 공간으로 느껴질 만큼 안락하고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가 맥주 한 캔을 건네며 “이사 온 지 몇 달 됐는데 이제야 뵙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두 손으로 캔을 받았다. 차가운 온도에 손끝이 찌르르했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내 손에 쥔 캔에 가볍게 부딪힌 뒤 말을 이었다. “이사 가려고 하신다면서요? 주인아주머니께 들었어요. 전 이 집이 너무 맘에 드는데. 바닥에 뒤꿈치 붙이고 걷는 게 이 집에서 처음이에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순간 그의 발뒤꿈치를 바라봤다. 내 시선을 알아챈 그가 말을 이었다. “십삼 년 동안 줄곧 옥탑에서 살았거든요, 처음 보는데 이런 말 해도 되나.” 장마가 유난했던 지난여름, 벽을 타고 물이 줄줄 흐르는 옥탑방에서 먹고 자는 그를 보다 못한 친구가 돈을 빌려줘서 겨우 이 집에 올 수 있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부산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그는, 서울에서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올라왔다고 했다. 100평이 넘는 이자카야를 관리하면서 영업을 마치면 메뉴를 짰는데, 그때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에 두 시간을 채 못 자도 기운이 펄펄 났단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단골손님이 같이 사업을 해보자며 제안을 해왔다. 업계에서 매너 좋기로 소문난 사람인 데다 본인의 사업체도 여럿 갖고 있어서 그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서울에서 드디어 자리를 잡는구나 싶은 마음에 설레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업 자금으로 여기저기서 돈도 많이 빌렸는데, 결국 동업자의 교묘한 책략에 속아 그는 공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쓰고 업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말을 마친 그는 가벼운 한숨을 쉬며 잔을 채웠다. “자려고 누우면 사람들이 저한테 막 욕하는 소리가 들려요. 개새끼야, 씨발새끼야... 정말로 내가 잘 못한 게 아닌데 아무도 내 말을 안 믿더라고요. 아예 들을 생각을 안 해요. 그 뒤로는 사람이 너무 무서웠어요. 남이랑 눈도 잘 못 마주치겠고. 가진 돈 다 잃고 갈데없으니 월세 10만 원 하는 옥탑에서 계속 살았거든요?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올라올까 봐, 올라와서 저한테 소리 지를까 봐 무서워서 뒤꿈치를 들고 살았어요. 혹시 옆방에서 시끄러우세요?” 아니요, 전혀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이번 여름 책정된 부동산 삼법으로 집세가 폭등하는 바람에 이사의 꿈을 고스란히 접어야 했던 나는 이 집이 싫었다. 여름에 습하고 해도 잘 들지 않아 답답한 집은 현실에 안착할 수밖에 없는 나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비로소 발뒤꿈치를 붙일 수 있는 공간이었구나. 말없이 맥주만 꿀꺽 마시는 내게 그가 갑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한번 보실래요?” 모 은행에서 만든 유튜브 영상이었다. 회사에서 치이고 통장 잔고는 바닥인, 고만고만한 삼십 대 청년의 하루가 압축되어 스쳐갔다. 영상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내 손등을 가볍게 쳤다. “여기예요, 여기. 독립은 했는데 자립은 못했다, 이 부분 너무 감동적이지 않아요? 스무 번이나 넘게 봤는데도 볼 때마다 눈물 난다니까요.” 그가 옷소매로 슬쩍 눈가를 문질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넘어 있었다. 친구 집이라도 가볼게요, 하고 말하며 일어나는데 그가 같이 일어나며 갑자기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젓갈이며 김치를 꺼내려는 그를 말리며 문을 나서는데, 그는 이거라도 가져가라며 내 품에 6개들이 에비앙 생수를 안겼다. 갑자기 여섯 자리 비밀번호가 떠올랐다.          


* 에이포 용지 한 장 분량의 픽션입니다. 소설 속의 인물과 배경 및 사건은 모두 허구지만, 열심히 쓰다 보니 저도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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