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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Dec 20. 2020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일요일 오전 아홉 시 이십이 분. 바깥은 영하 9도. 맨발이라 발이 조금 시리고 테이블 한편에 먹다 둔 피자에선 고소하고 진한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다-냉장고에서 차게 식혔다가 꺼내먹는 피자를 정말 좋아한다-. 고요한 가운데 출처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어딘가에서 아주 옅게 웅웅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무로 된 넓은 테이블, 적당한 조도, 창밖으로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와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때마침 공간 한편에 놓여있는 노트북. 글을 쓰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노트북 비밀번호를 알 수 없어 곤히 잠든 친구를, 미안하지만 몇 번이나 문 앞에서 살금살금 불러 깨웠다. 친구가 잠결에 괴로운 소리를 내며 겨우 일어나 비밀번호를 불러주곤 다시 잠들었다. 미안!  


친구의 집에서 자고 일어난 참이다. 친구가 한 달 전에 이사를 했고 집 정리되면 놀러 오라는 말을 한번 했었기에 어제 렀다. 이사 전에도 종종 이 친구의 집에서 다른 이들과 모임을 갖곤 했었는데, 공간을 잘 정리하는 디자이너답게 언제나 집이 참 예쁘고 깔끔하다는 인상을 준다. 벽이며 바닥이며 물건들이 온통 회색과 블랙 계열이라 처음엔 어둠의 자식인가 싶었지만, 평소 작업을 할 때 워낙 다양한 색깔을 접하기 때문에 눈의 피로도를 덜기 위한 선택이라는 이유를 알고 난 뒤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날이 추우니까 따뜻한 국물요리로 저녁을 함께하기로 하고 가볍게 들렀는데 이야기가 점점 길어졌고, 지하철 막차가 끊길 때쯤이라 서둘러 패딩을 챙겨 입으며 일어나는 나를 친구가 붙들었다. 이웃이 피자를 들고 오는 중이라고. 피, 피자? 결국 편한 옷을 빌려 갈아입고는 새벽 한 시가 넘도록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가 내준 방에 누워 살갗에 닿는 사근사근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따뜻한 음식, 편안한 공간, 깊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인생의 3요소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지난 주말에도 다른 친구의 집에 가서 사람들과 함께 요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왔기 때문에, 인생의 3요소는 이게 맞다는 확신과 함께 새벽 두 시가 넘어 잠에 빠졌다.


어릴 때는 '누구누구네 집에 놀러 가는 일'이 지연스런 일이었지만, 크면서는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 본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생활의 각박함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웃지 못할 구호처럼, 누군가를 선뜻 집으로 초대할 마음의 여유도, 제 집 들어가 간신히 몸 뉘이기도 힘든 마당에 굳이 애써 남의 집까지 들러야 할 이유도 찾기 힘들다. 생활이 각박하면 각박해질수록, 몸담고 살고 있는 집이라는 공간이 삭막해질수록 집을 대신할만한, 집보다 훨씬 예쁘고 근사한 공간이 늘어났다. 시장은 생활의 각박함 가운데 휴식을 찾고 싶은 사람들을 심리를 꽤 적확하게 꿰뚫었고, 인스타에 찍어 올리면 하트를 금세 모을 수 있는 장소들이 곳곳에 즐비해졌다. 나 역시도 예쁘고 좋은 공간을 찾아 헤매 왔고, 그런 일에 나름의 애호와 안목까지 어느 정도 갖추게 됐지만 그래도 역시 친구의 집에서 만나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친구가 이사를 가거나 신혼집을 마련하면 먼저 가겠다고 말을 꺼내는 일이 다반사였고, 친구들도 흔쾌히 집으로 초대를 해줬다. 바깥에 마련된 예쁜 공간도 좋아하지만 그런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결의 온기와 편안함이 집에는 있다. 그런 점 때문에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하면 아무리 멀어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가려고 하는 편이다. 코로나 이슈가 한해를 삼키다시피 한 올해는 친구의 집에 들르는 일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진 반면, 한결 더 각별해지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공간이 제 기능을 잃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집에 머물고 집을 좀 더 가꾸고 집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집으로 놀러 와, 라는 그 말에 담긴 다정함을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집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집으로 초대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고맙다고.


다른 이의 집을 방문할 때 제일 좋은 순간은 막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집의 첫인상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문을 열면 낯설지만 금세 익숙해질, 그리운 줄도 모른 채 그리워해 왔던 온기가 나를 감싼다. 나는 그곳에서 친밀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그러니까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좀처럼 나눌 수 없는 음식과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눈다. 지난주에 친구의 집에 모였을 때는 먼저 와있던 이들이 한참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문을 열자 불로 덮인 후끈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기름 냄새와 재료 써는 소리, 요리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데 뒤섞여서 나도 모르게 안심해버렸다. 아, 사람 사는 공간은 이랬었지. 하고. 지난여름에 친구가 결혼하고 나서 멜론 한 통을 들고 찾아간 신혼집도 좋았고, 새집에 와인 한 병을 들고 찾아가서 기울이던 밤도 좋았다. 내가 지금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이 공간은 문을 열자 희미한 담배냄새가 났다. 이 집의 주인인 친구가 이제 일어나서 퉁퉁부은 얼굴로 나를 향해 막 물은 참이다. 뭐해? 유명 작가가 되려고 글을 쓰고 있어. 친구는 말없이 엄지를 날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 더 글을 덧붙이자면, 내가 이 글에서 명명한 '친구'는 모두 직장동료들이다. 여간해선 곁을 주지 않는 내가 전 직장, 혹은 전전 직장 동료들의 공간을 기웃거린다. 데이터며 파일만 주고받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쌓이며 이야기와 음식을 나누게 됐다. 가끔은 마주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자 생각에 잠긴다. 우리 정말 친구가 되었네, 하고. 오갈 곳 없게 된 다음에야 집이 비로소 제기능을 하는 것처럼 직장을 옮긴 후에도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던,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보는 것으로 인연을 이어가던 이들이 어느새 나의 친구가 되었음을 그들의 공간에 머무르며 뒤늦게 깨닫는다. 발을 지나 이제는 무릎까지 시려오고 귀퉁이만 야금야금 뜯어먹은 피자는 완전히 차갑게 식었다. 노트북 화면 구석의 시간을 확인하니 열 시 삼십사 분. 나는 천천히 피자를 마저 먹고 요즘 읽고 있는 책을 좀 읽다가 씻고 이 집을  참이다. 친구가 씻고 나오면 이야기를 나누느라 나서는 시간이 좀 더 어질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언제나 흔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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