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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Dec 23. 2020

나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지났다. 이제 어둠을 넘어 빛으로 접어든다. 일곱 시가 다 되어가는 아침에 간신히 눈을 뜨고(이러면 백프로 지각이다) 바깥의 안부를 확인하면 여전히 짙은 어둠이 드리우고 있지만, 이 조용한 어둠이 물을 머금은 듯 차차 옅어지다 마침내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 눈부신 빛을 선사할 것임을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에, 무겁게 드리운 어둠에도 쉬이 마음을 놓게 된다. 동지가 지난지는 벌써 이틀이 되었지만 이왕 늦은 김에 좀 느릿느릿하게 이 시기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크리스마스의 탄생  

매주 토요일마다 듣고 있는 수업에서 다룬 마지막 작품은 크리스마스에 관한 짧은 소설, 폴 오스터<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이다. 선생님은 매 강의의 마지막을 이 소설로 마무리하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작품과 시기가 맞아떨어다는 말씀을 하셨다. 화면 속 선생님의 등 뒤엔 크고 아름다운 트리가 불을 밝히고 있어서, 계절감이 한층 풍성하게 느껴졌다.

한여름이나 가을, 혹은 이른 봄에 읽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도 의미가 있을 테지만, 크리스마스에 맞춰 (코로나로 인해 각자의 방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물을 받은 것처럼 좋았다. 이 소설 속에는 여러 가지 거짓말들이, 짐짓 진솔한 얼굴을 하고는 태연하게 등장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거짓말들을 살펴보면서 의견을 나눴고 마지막엔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는 진실일까요?"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에서 기하는 떠들썩한 이지만, 과연 그날 정말로 예수가 태어났느냐는 물음 백 프로 진실이라고는 아무도 답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 중 하나는 로마의 태양신 숭배일을 크리스마스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사정은 동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지는 쉬이 잊는 절기가 돼버린 지 오래지만 예전에는 동지를 한 해의 시작으로 삼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하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태양이 다시금 길어지는 이때를 빛이 어둠을 물리치는 시기라 하여 중요히 여긴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지금이야 어딜 가든 24시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지만 그때는 태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버렸을 테니, 그 시대의 사람들이 해가 다시 길어지기를, 빛을 되찾기를 얼마나 기다렸을지 가늠해본다. 동지에 얽힌 재미있는 우리 속담 중에 '동지 지나 열흘이면 해가 노루꼬리만큼씩 길어진다'가 있는데, 살금살금 해가 길어지는 모양을 잘 포착한 것 같아 웃음이 나는 말이다. 매일매일 하늘을 얼마나 들여다봤으면, 마침내 해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을까. 노루 엉덩이에 달린 작달막한 노루꼬리를 잠깐 떠올려보기도 했다.


빛, 그리고 어둠 

동지. 겨울이 (마침내 끝에) 다다른다는 동지의 의미를 유난히 곱씹어볼 수밖에 없는 한 해였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보통의 인간이지만, 올해의 내 몸은 해의 움직임에 맞춰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책이 하지 무렵에 나왔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그날을 향해 다글다글 익어가는 해처럼 그 맘 때의 나는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물리적인 빛과 비유적인 빛 모두. 퇴근 후 내 방은 저녁을 지나 새벽, 아침이 이르도록 내내 불이 켜져 있었다. 낮에는 회사일을 하고 밤에는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빠듯한 시간을 쪼개느라 잠을 거의 잘 수 없었다. 쪽잠을 청하면서도 누워서 원고를 봤다. 출퇴근 시간에는 지하철에서, 점심시간에는 회사 근처 놀이터 시소에 앉아서 종이 뭉치를 들여다봤다. 해내야 한다는 의무감과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서 그야말로 불이 꺼지지 않는 빛의 시기를 보냈다. 

그렇게 출간을 마치고 나서 내가 맨 처음 한 일은 그다음 책의 기획안을 쓰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장 휴식하라고 등을 떠밀고 싶은데, 앞으로도 해내야만 하고 또 해낼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음식과 휴식을 공급받지 못한 몸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 뒤로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통증을 경험했다. 살면서 처음 겪는 강도였다. 어느 해보다 장마가 유난하던 여름이었는데, 통증이 나를 덮칠 때면 회사 건물 옥상에 올라가 걸핏하면 눈물을 흘렸다(퍼붓는 비를 맞으며 청승을 떤 적도 여러 번이다). 몇 달간 계속되는, 영원히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통증 앞에선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번번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글에 기대 보려 했지만, 성급하게 만든 기획안도 (당연히) 뜻대로 되지 않았고 글에는 온통 축축한 기분만 가득 배어 나왔다. 이 무렵 통증에 대한 해결법을 좀 얻을 수 있을까 싶어 펼친 책에는 '영혼의 어두운 터널'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저마다의 터널이 얼마나 어둡고 깊은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끔찍한 어둠 속을, 끝도 없는 터널을 지나는 기분에 내내 사로잡혀 지냈다. 어떻게든 터널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렇게 올해가 다 흘러가고 한해의 끝에 서있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아직 터널 속이다. 이 어둠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려는 발버둥은 간신히 멈췄다. 어두워져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듯, 어둠 속에서 내가 보아아 할 것들이 있었다. 몸을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서 들여다볼 마음이 있었다. 떼를 쓴다고 밤이 사라지지 않듯, 눈을 감는다고 어둠이 사라지진 않는단 걸 알면서도 걸핏하면 떼를 쓰고 눈을 감는 나.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오기 렌을 보고, 주인공은 잠시 혼란에 빠지지만 이렇게 독백한다. "한 사람이라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는 진짜가 아닐 리 없다"라고. 가장 깊은 어둠은 마침내 가장 환한 빛과 언젠가 닿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터널이 끝날 것임을 믿어주는 사람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 


태양은 다시, 봄을 향해 가고 있다. 

터널에서 보내는 이 시간이 모두 거짓말처럼 여겨질 때를 기다린다. 

어둠의 끝에서 빛을 향해 터벅터벅 걷는다. 오늘도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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