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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Dec 27. 2020

문학하는 헛된 마음

문지혁 선생님, 고맙습니다.


며칠 전 아침, 친구가 카톡을 보내왔다. 본인이 쓴 글에 악플이 달려서 상처 받았다는 이야기 끝에 "책 내는 게 돈도 안되고 힘도 들고 해서 난 내려놨어"라는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며칠간 붙들었다. 처음에는 '책 내는 건 당연히 돈도 안되고 힘든 건데(물론 개중에는 책 내서 돈 잘 버는 사람도 있고, 힘들이지 않고 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었고 그다음에는 '나는 이걸 왜 하고 싶어 하며 앞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었다. 장강명 작가의 책에서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한다'라는 문장을 읽고 얼마간 위로를 받았으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과연 써야 하는 사람인가. 친구 말대로 돈도 안되고 힘든 이 일을 운명처럼 짊어진 사람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도 아닌 것 같은 쓰는 행위는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 어제의 수업에서 운 좋게 답을 구한 것 같아 이 글을 쓴다.

  

두 달간의 소설 수업이 어제로 끝났다. 코로나가 심화되는 바람에 수업 후반 삼주 가량은 각자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수업을 가졌다(강의실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떨어져 앉았기 때문에,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고 나서야 비로소 수강생들의 얼굴을 알게 됐다). 원래대로라면 마지막 수업 후엔 그간 나누지 못했던 문학 밖의 이야기를 나누며 선생님이 사주시는 차도 한잔씩 마셨다고 하는데, 상상만 해도 뭔가 조금 쑥스럽고 다정한 공기가 감돌 것 같은 그 시간을 가지지 못한 건 못내 아쉽지만 끝까지 자리, 아니 모니터 한편을 지켜준 수강생 분들과 함께한 시간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보통 강의는 두 시간 분량인데 어제는 마지막이니만큼 수업 후에도 그간의 소회와 전하고 싶은 말, 질문 등을 나누는 시간을 더 가졌다. 의미 있는 물음과 대답들이 오갔고, 나도 그간 품고 있던 물음을 꺼냈다.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이들에게 많은 작가분들이 했던 말-많이 읽고 많이 쓰세요, 멈추지 마세요-에 대한 재정의를 요하는 물음이기도 했다.

"수업에서 어떤 문장은 좋은 문장이고 이렇게 써야 한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 문장이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인공의 감정이 구체적으로 느껴지면 좋은 문장입니다."

선생님의 대답을 듣고 갸우뚱하는 가운데, 선생님이 좀 더 살을 보태주셨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감각되는 세계가 독자에게까지 닿는 것이 좋은 문장이라는 설명이었다. 하늘이 파란데 주인공의 어떤 심경으로 인해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 그런데 그 노란 하늘이 독자에게도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그것은 좋은 문장이라는 설명이려나. 이해는 되었지만 물음이 하나 더 생겼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은 왜곡된 세상으로 이해가 되는데요"

"네, 왜곡된 세상 맞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주인공의 시선으로 왜곡된 세상을 봐야 할까요? 왜곡된 세상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좀 더 덧붙여서 질문을 드리자면, 왜곡된 세상을 들여다보기를 원하는 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가요?"

거듭되는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그게 바로 이야기의 본질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야기, 즉 왜곡된 세상을 궁금해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본능 때문이라고. 생존을 위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생존 욕망이 이야기를 탐하게 만든다라... 짜릿한 대답이었다.


흔히 문학은 먹고사는 것과 동떨어진 것, 팔자 좋은 것, 현실 감각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나를 '작가님'으로 지칭하며 걸려오는 전화의 발신자들 대부분이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처럼. 그런데 되려 살고자 하는 생존 욕망이 이야기, 문학의 근원이라니. 삶과 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막을 쳐놓고 살아왔던 내게는 유리막에 짜자작 금이 갈 정도의 의미 있는 지침이었다. 문학으로 (독자의) 마음을 보듬을 순 있지만 삶을 껴안을 순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따뜻한 이야기로 간밤의 악몽은 물리수 있지만 괴롭히는 직장 상사는 물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이야기에 기대 살아왔고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고 싶어 하면서도, 이야기의 힘을 축소하고 닿을 수 있는 범위를 머리로 한정 지어 왔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나는 이야기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고 모든 세상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좀 더 잘 살아남을 수 있다. 들판에 널린 무수한 것들 중에 무엇을 먹고 먹지 말아야 할지 모두가 망설이는 가운데, 호기심과 두려움을 안고 무언가를 입으로 가져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의 사람들은 실수와 실패를 피하고 살아남은 것처럼, 문학하는 사람들 덕분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란 파도를 타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게 아닐까. 바다로 나가 작살을 들고 고래와 싸우는 노인의 이야기가 거짓이라도, 그 이야기를 읽고 힘을 얻어 삶을 헤쳐나가는 순간 그 이야기는 진실이 되는 것처럼.


습작 시절을 어떻게 견디셨냐는 다른 수강생의 질문이 이어졌는데, 얄궂게도 그 순간 마침 인터넷이 나가버려서 수업이 끝난 뒤에야 커뮤니티에 부랴부랴 메모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습작 시절을 어떻게 견디셨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간략하게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정한 몇 분이 자세하게 답변을 옮겨주셨고, 마지막에 선생님의 답변이 달렸다.

"저는 12년이란 시간을 '헛된 마음'과 '부족한 현실 감각'으로 버텼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때 좋아했던 말은 '사는 것과 쓰는 것, 두 가지 모두가 나에겐 도덕적 책무'라는 어느 유럽 작가의 말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고, 이제 저에게 삶과 글은 분리 불가능한 무엇입니다."

첫 시간에 선생님이 문학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셨다."문학은 뒤늦게 도착한 편지입니다"라고. 문학은 곧이곧대로 가지 않고 굳이 빙빙 둘러서 가는 것이라고. 그 순간 속에 온전히 머무를 때는 까맣게 몰랐다가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문학이라고. 갑자기 인터넷이 끊겨서 모두가 들었던 내용을 나만 몰랐을 때, 그리고 그 대답을 다시 뒤늦게 텍스트로 받게 된 이 수업의 마지막 순간 자체가 나에게 문학이 되었다.


책을 내기 전까진 막연히 책 한 권을 내는 것이 막연한 목표였다. 첫 책이라는 관문만 넘으면 될 줄 알았는데 첫 책을 펴내고 나서 나는 되려 방황을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무엇을 써야 할까? 한발 나서지도 못하고 발을 빼지도 못하는 미지근한 이 마음으로 얼마나 해나갈 수 있는 걸까? 내가 작가라고 불려도 되는 걸까? 그럴 자격이나 있는 걸까? 쓰지 않기 위한 질문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두 달 남짓, 주말마다 가진 여덟 번의 수업을 신청한 이유는 쓰기에 지쳐서였다. 진지하게 쓰는 사람들 곁에 있으면 최소한 자극이라도 받겠지, 숙제를 제출해야 하니까 억지로라도 쓰겠지, 하는 마음으로 신청했었다(끝내 한 번은 제출하지 못했다). 쓰는 사람들 곁에서 하염없이 부끄러웠지만, 한 주에 한 장 분량의 숙제를 간신히 제출하면서 기쁜 마음이 깃드는 순간을 문득문득 느꼈다. 선생님의 대답을 여러 번 읽으면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 보니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받아버린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쓰지 않아도 되지만 누군가는 써야 한다면 기꺼이  그 누군가가 되어보자고, 문학하는 참되고 헛된 마음으로 이번 생을 살아보자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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