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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Dec 01. 2016

흔적들의 흔적

2016년 12월 1일


동그랗게 고여있는 지난 비의 흔적 때문일까나. 출근길 버스에 몸을 싣고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흔적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사랑하는 벗이나 연인에게 직접 건넨 나의 마음은 여전히 어느 종이 귀퉁이나 물건 따위에 고요히 담겨 있을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었던 누군가를 위한 내 마음의 흔적이니까.


그러면 그 흔적들은 어디로 갔을까. 입지 않는 옷더미 사이에서 함께 뒹굴고 있을까, 진즉에 쓰레기통으로 향했을까, 생각지도 못하다 어느날 발견되어 피식 한번 그대들을 웃음짓게 할까.


참으로 꽤 오랫동안 흔적에 집착했던 나는, 그래서 디지털 세상의 도래가 한편으로 퍽이나 무서웠던 것도 같다. 누렇게 바랜 낡은 앨범을 들추며 웃다가 울다가 할 일도 없고, 어린 엄마의 글씨를 가만 만져보며 뭉클할 순간도 없고, 지난 사랑을 어느 오후에 떠올리며 웃음지을 날도 없고.


모든 무게는 흔적을 가진다. 무겁고 투박한 카메라, 들고다니기 퍽이나 번거로운 공책과 펜, 알알이 글씨가 박힌 다정한 편지. 자꾸만 빨라지고 가벼워지는 것이 최대 목표인 것 같은, 급기야는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만 같은 이 시대는 그래서 흔적이 남지 않는다. '삭제' 버튼 하나면 지나온 모든 시간과 기억과 감정을 한꺼번에 휘발시킬 수 있을 처럼. 삭제 버튼을 앞세우고 뒤에 가만히  우리는, 그래서  시간과 기억  앞에 기세등등하다.


어느 노랫말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 우리에겐 지나간 것에 의미를 매기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려면 그것들이 얼마간은 내 곁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들을 가만히 품고 바라볼 줄 알아야한다. 우리는 그저 바쁘게 스칠 뿐이다. 그래서 자꾸만 텅 비어 가고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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