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시원한 이 계절이 오면 나는 짧은 반바지를 꺼낸다. 반바지에 긴 소매 셔츠를 대충 걸치고 슬리퍼를 구겨신고는 동네골목을 비척거린다.
고된 퇴근길. 집에 돌아와 잠깐 몸을 뉘었다가 반바지를 꺼내입고 집을 나와 슬금슬금 걷는데, 저녁이 내린 - 그러니까 푸름과 검정이 뒤섞인 - 골목 어귀에서 '잘 자! 잘 자! 잘 자!' 하는 맑고 귀여운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따로 사는 아빠인지, 오빠인지, 삼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홍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이 밤에 전혀 불필요한 뽀얀 레이스 달린 양산까지 앙증맞게 펴 든 여자아이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아빠 오빠 혹은 삼촌을 향해 몇 번이고 손을 흔드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 오빠 삼촌은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여자아이의 잘자에 맞춰 몇 번이나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 자, 라는 말. 그러고보니 들어본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나는 잘 자라는 말 없이 잘 자게 되었을까. 꾸벅꾸벅 졸면서도 업데이트 된 웹툰을 몰아보느라 핸드폰을 얼굴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피곤에 절어 시퍼렇게 형광들을 켜고 자다 놀래 번쩍 깨기도 하고. 영창피아노보다 백배는 더 맑고 고운 목소리가 계속 기억나 나도 참 오랜만에 '잘 자' 하고 중얼거려 보았다. 다정하고 따스한 한 겹을 더 걸친 것처럼 그렇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