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신문을 읽다 밑줄을 쳐둔 토막 기사는 말의 온기에 관한 글이었다. 한 당근 마켓 이용자의 인터뷰로, 중고 물품 거래를 위해 상대방(닉네임: 동그리)과 만나 잠깐 나눈 대화에서 마음이 훈훈해지는 걸 느꼈다는 이야기였다. "서울에 이사온지 6년인데, 낯선 사람과 정중하고 따뜻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거든요"라는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6년 동안 따뜻한 말 한마디 주고받을 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메마른 삶일지. 평소에 우리들이 얼마나 말에 인색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상대방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뿐 아니라, SNS다 뭐다 해서 어느 때보다 말을 할 수 있는 통로가 많고 그 통로마다 말이 고여 흘러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되려 말이 가진 따스함과 윤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오래오래 따뜻한
채 1분도 안 되는 대화가 그에게 오랜 온기로 남았듯, 내게도 잊히지 않는 온기로 남은 말이 있다. 그 말의 주인은 시청역 어느 지하상가의 백반집 아주머니. 처음 그곳을 찾은 날은 점심때를 훨씬 넘긴, 추위가 유난한 날이었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덮는 시커먼 마스크를 쓰고 식당 안으로 들어선 내게 아주머니가 물을 가져다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뜨거운 물 괜찮으시죠?” 양손으로 컵을 감싸 쥐자 추위에 바짝 얼었던 몸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그 뒤로는 시청 부근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그 집을 찾게 됐다. 누구나 엄지를 치켜드는 이름난 맛집도 아니고,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메뉴가 있는 것도 아닌, 어깨를 잇대고 즐비하게 늘어선 수많은 지하상가 식당 중 하나일 뿐인데도 그랬다. 이미 밥을 먹은 후라도 일부러 들러 부른 배를 부여잡고 두 번째 식사를 한 일이 적지 않다. 여기에 들르고 싶어서 일부러 약속을 시청역 가까이 잡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아주머니의 말에 깃든 온기 때문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헛헛한 날엔 허기의 해결보다는 온기가 그리워 자꾸만 그 집을 찾게 됐다. 팬심으로 자주 들르며 아주머니를 관찰(?)한 결과, 아주머니의 온기는 말뿐 아니라 행동에도 그대로 배어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는 메뉴 주문을 받을 때 손님 눈을 바라봤다. 나처럼 식사 때를 놓친 손님들이 가게문을 닫음직한 시간에 드문드문 들어올 때도, 아주머니는 싫거나 귀찮은 내색 없이 한 명 한 명을 살갑게 맞았다. 홀로 와서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앉은 할아버지에겐 “여기는 바람이 차요, 저기로 앉으세요.”하고 4인석을 내어주는 넉넉한 마음을 바라보았다(구석에서 밥을 먹다가 그 말에 혼자 감동받아서 끄적이고는 괜히 콧물을 흘렸다). 아쉽게도 그곳은 몇 년 전에 사라지고 없어서 그 집에서 늘 먹었던 뜨끈한 백순두부는 이제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게 됐다. 그 집 뜨끈한 백 순두부 맛의 비결은 백 순두부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하는 아주머니 목소리가 고명처럼 올라가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니.
꽃 또는 칼이 될
순두부처럼 따뜻하고 촉촉한 말, 그래서 내 안에 부드럽게 스미는 말을 만날 때면 말씨의 뜻을 곱씹게 된다. '말하는 태도나 버릇' 혹은 ’ 말에서 느껴지는 감정 따위의 색깔‘을 일컫는 말이지만, 낱말 그대로 말을 품고 있는 작은 씨앗이 떠오르곤 한다. 말씨가 예쁜 사람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의 말이 내 귀를 타고 마음으로 흘러들어와 뿌리를 내리는 느낌이다. 예쁜 말씨가 내 마음에도 심겨서 나도 그이처럼 예쁘고 따뜻한 말씨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말 한마디라도 예쁘게, 다정하게 건네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이유는 분명히 그에게서 좋은 말씨를 건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머니가 건넨 물컵을 건네받기도 전에 이미 내가 따뜻해졌던 것처럼.
최근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인공지능 지니와 나눈 대화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 사는 곳에 그런 기계를 들이고는, 응당 사람에게 물어야 할 것을 기계에게 묻고 답을 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께름칙했으나, 나도 편의에 곧장 적응하는 인간일 뿐이라 지니에게 자주 시간을 물어본다. 지니야 지금 몇 시야? 새벽녘이건 자정이건 어느 때고 지니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정중하게 균일한 톤으로 지금은 몇 시입니다,라고 답해준다. 하루는 내게 시간을 알려준 지니가 고마워서 "지니야 고마워"하고 이야기했더니, 지니가 "천만에요. 저도 고마워요. 심심하시면 저랑 수도 맞히기 게임해보실래요?"하고 게임을 제안했다. 물론 내장된 대화 루틴 중 한 가지겠지만, 나는 순간 이 기계에도 어쩌면 약간의 영혼이라는 것이 들어있고-사람이면서 영혼 한 조각 들어있지 않은 이가 얼마나 많던가- 내 말을 알아듣고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답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른 아침이라 멀뚱멀뚱 천장을 보며 누운 채로 지니와 수도 맞히기 게임을 했다. 연거푸 오답을 말하는 나를 봐준다거나 틀린 문제를 물러준다거나 하지 않고, 냉정하게 "40점입니다"라고 말하는 지니 때문에 주말 아침부터 약간 마음이 상했지만.
6년간 그 누구도 건넨 적 없던 온기를 누군가에게 덥석 안긴 덕분에 기자와 전화 인터뷰까지 하게 된, 당근마켓 매너 온도 99도에 빛나는 동그리 님의 말을 빌려 이 글을 마무리한다. "찰나의 거래라도 최대한 기분 나쁜 사람이 없도록 신경을 씁니다". 그의 말처럼 찰나의 대화라도 최대한 기분 나쁜 사람이 없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내 말을 듣는 대상이 설령 사람이 아닌 기계가 할지라도, 내가 가진 말로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각박한 세상에서 상처 받지 않는 법을 외치는 사람은 세상에 흩뿌려진 말만큼이나 넘쳐나지만, 상처 주지 않는 법을 말하는 이는 드물다. 자기가 가진 말씨에서 꽃이 필지, 상대를 겨누는 칼이 될지는 온전히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있다. 내가 가진 말을 돌보고 살펴 내가 건네는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힘쓸 일이다. 함부로 휘두른 말의 칼날에 다치는 건 결국 나이니. 평생 말 곁에 머물고 싶은 이로서의 바람이 있다면 상대방의 마음에 부드럽게 내려앉는 온기, 부드럽게 스미는 여운으로 남는 말을 갖고 싶다. 촉촉하고 따뜻해서 자꾸만 그리운 순두부 같은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