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계속 살아있어요

by 꽃반지


끝이 났어도

요즘 들어 부쩍 ‘완결’을 알리는 소식들이 눈에 띈다. 즐겨 읽던 웹툰 하나가 7년간의 연재를 막 끝냈고, 아끼는 마음으로 찾곤 했던 홍대 수카라가 15년간의 운영을 마치고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엇이 사라진다고 하면 마음이 금세 우울하고 초조해진다. 자려고 누워 핸드폰을 뒤적이다 완결을 알리는 작가의 말을 읽었을 때도, 인스타그램으로 수카라의 영업 종료 소식을 보았을 때도 처음에 든 감정은 먹먹함이었다. 끝났구나. 좋아하던 것이 또 하나 사라지는구나. 내가 그것에 쏟아부었던 마음과 시간은 도무지 돌려받을 길이 없고 하나의 세계가 문을 닫는구나. 내게는 다시는 디디지 못해 그립기만 할 세계로 남는구나. 근사한 계절 음료가 나오면 먹으려고 모아둔 수카라 쿠폰에 찍힌 도장 개수를 차곡차곡 헤아려보면서 생각했다. 좀 더 많이 가봐야 했다고, 시간과 걸음을 아끼지 말아야 했다고.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작가의 말과 가게의 소식을 곰곰이 읽어보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끝을 말하는 글에서 이야기하는 건 끝만이 아니었다. '계속'이 보였다. 웹툰은 끝나지만 다른 채널을 통해 팬들과 교류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으니 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공간은 사라지지만 그곳에서 함께 나누고 배운 것들을 여러 사람들이 이어주고 있어서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살아있다, 와 같은 말들. 끝만 보느라 끝과 함께 있던 계속이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그렇구나. 왜 무언가가 사라지면 그것에 아끼지 않고 내주었던 마음도 함께 사라지는 거라고 여기고는 못내 안타까워만 했을까. 나와 같이 아끼고 매만지는 마음들이 여럿이라면, 그런 마음들 덕분에 그것은 끝나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 여러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 시간이 오래 지나도 여전히 떠올리고, 잠시간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내 안에서 살아 제 몫을 다하고 있는 것인데.


계속되는 마음으로

이미 끝났지만 내게도 아름답게 계속되는 장면이 있다. 오래전 2월, 생일을 겸해 태국 북부로 훌쩍 떠났다. 빠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일본과 타이완, 홍콩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어느 날 함께 모여 저녁을 먹다가 이왕 이 곳까지 온 김에 북부 끝까지 가보고 싶다고 말을 꺼냈더니, 다들 한번 가보자며 내 말에 흔쾌히 동의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마을 가운데서 만난 우리는 각자의 자그마한 스쿠터에 몸을 싣고 태국의 맨 끝으로 함께 떠났다. 평생 운전이라곤 범버카 밖에 해본 일이 없던 나는, 숙소를 함께 썼던 타이완 친구의 뒤에 바짝 매달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가는데만 무려 천여 개의 커브를 돌고 돌아야 다다를 수 있다는 곳. 가는 중에 마주친 이들은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떠드는 우리의 조합을 궁금하게 여기는 한편, 목적지를 듣고는 거기까진 못 간다며 다들 말렸다.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급격한 커브에 위험천만한 순간도 넘기면서 그렇게 스쿠터로 네 시간 여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잠깐의 성취감과 여유를 만끽했지만, 돌아가는 길이 만만찮을 걸 알게 되니 아무것도 모르고 호기롭게 떠나올 때와는 달리 마음 한 구석이 묵직했다.


깊은 산속에는 어둠이 빠르게 찾아왔다. 몇 시간 채 지나지 않아 사위가 온통 캄캄해졌다. 봄처럼 따뜻했던 한낮이 무색하게 도로에는 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저마다 핸들을 하나씩 잡은 이들은 얼굴에 부딪는 바람과 미끄러운 도로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컴컴하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앞선 스쿠터의 붉은 꼬리 등뿐. 다들 각 나라의 말로 조심하라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보이지 않는 앞을 주시하고 있을 때, 친구의 허리를 꽉 붙들어 맬 도리밖에 없었던 나는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홀로 호사를 누렸다. 문득 머리를 들어 바라본 하늘에 선명하게 오리온자리가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이은 커브를 도느라 이리저리 굽이치는 산길 위에서 내 머리 위의 별들도 함께 흔들렸다. 밤하늘에 펼쳐진 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오리온의 허리춤에 나란한 별 세 개가 마치 우리들 같아서 웃음이 났다. 이웃한 저 별 셋도 실은 서로 아주아주 많이 떨어져 있다는 말을 언젠가 읽은 적 있었다. 1초에 지구 일곱 바퀴 반을 돈다는 빛의 속도로도 600년을 꼬박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서로의 거리. 그런 사이가 상상력 풍부한 누군가에 의해 시공간을 넘어 한데 묶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지 않나 생각했다. 일생에 어쩌면 단 한번 마주칠 일 없었던 얼굴들이, 생의 잠깐 동안 한데 모여 하나의 방향으로 함께 흐르고 있으니.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어둠을 무사히 뚫고 나온 우리는 마을 어귀 노점에서 뜨거운 국수를 먹었다. 찬 바람을 맞느라 친구들의 볼이 모두 발갛게 얼어있었다. 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았다고 내가 이야기하니, 다들 잠깐 스쿠터를 멈추고 별을 보고 싶었다며, 밤이 늦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저마다 이야기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으면 멈춰 서서 별을 볼걸 그랬다며 아쉬워하며 국수를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잠에 빠진 타이완 친구의 볼 위에 내 손을 살며시 대어보던 그날 밤의 기억으로 태국 여행은 끝났다.


서로를 오래 기억하는 것

“지현! 나 이제야 여행의 진짜 의미를 알겠어.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소중한 순간을 나누고 서로를 오래 기억하는 것. 이게 진짜 여행이라는 걸 갑자기 깨달았어. 너희와 함께한 그 날이 내 인생에서 제일 반짝이고 아름다운 순간이야.”

한국으로 돌아와 여행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던 어느 밤, 함께 했던 무리 중 중국 친구 웨일러가 태국에서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 좋아 다시 그곳을 찾았지만 그때만큼 아름답고 벅차진 않다며, 한참이나 뜸을 들인 뒤에 수줍은 목소리로 우리들이 많이 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목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 들으면서, 밤공기를 가르던 속도와 덜덜 떨리게 춥던 온도와 너무너무 아름답던 밤하늘을 떠올렸다.


겨를 없이 살아가다 이따금 밤하늘을 들여다볼 때면 오리온자리가 빛나고 있어서 깜짝 놀란다. 벌써 또 겨울이 왔구나 하고. 그리고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웃고 마는 것이다. 겁도 없이 스쿠터를 타고는 작은 모험을 떠난 우리의 모습과 빛나던 밤하늘의 별들과 보고 싶은 얼굴들을 하나하나 그려보면서. 헤어질 때는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삶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아름다운 기억은 쉬이 휘발되며, 지키고 싶은 약속일수록 지키지 못하게 마련이라는 걸. 그렇지만 그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이제 내게 평생을 두고 반복해서 떠올리다 끝내는 눈물을 글썽이고 마는 아름다운 장면이 되어버렸다. 그 장면은 내 마음속에 박혀 언제까지고 빛난다. 우리들의 어깨 위를 무겁게 누르며 쏟아질 듯 반짝이던 그날의 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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