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아니었음 못하는 거였지

by 꽃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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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싱어게인>은 무명의 가수, 혹은 시대로부터 잊힌 가수들이 출연진으로 등장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특히 첫 회부터 꽤나 인기를 끌었던 스물두 살 청년 이무진의 Top 10 무대를 인상 깊게 보았다. 조용필의 <꿈>이라는 노래를 선보인 무대도 인상 깊었지만 무대를 둘러싼 말들이 더욱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아직 스물두 살인 청년이 어떻게 '데뷔 4년 차 무명가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는가, 하는 궁금증이 해소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4년 전 노래를 하고 싶었던 고등학생 이무진은, 한 웹툰 주제가 공모전에 응모했고 거기에 당선이 되어 음반을 내게 됐다고 했다. 구독자가 스무 명 남짓 되는 웹툰이었다며 쑥스럽게 웃는 그의 말에, 심사위원 중 한 명이 “그거 안됐으면 참가 못하는 거였다”라고 말했다. 그렇구나, 그거 아니었으면 지금 저 자리에 못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로 나가는 용기는

사람은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여간해선 손 닿을 수 없는 것을 탐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손안에 쥔 것은 영원할 것처럼 허투루 여기다, 잃고 나서야 귀한 것이었구나 하고 거듭 안타까워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이야기이다. 나의 회사 생활을 돌이켜보면, 난 이런 일하러 대학 졸업하고 유학 갔다 온 거 아닌데, 라는 알량한 마음으로 알량하게 일했다. 그런 마음이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낱낱이 드러났다. 실수가 많다고 야단을 맞을 때마다 반성하기보다는 입을 비죽거렸고, 사회 초년생이 받는 고만고만한 월급은 성에 차지 않아 일주일도 안돼 모두 써버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버는 돈이 얼마간 늘어났어도 눈앞의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습관이 그대로 배어 십 년 가까이 그렇게 벌고 쓰고 지냈다.


글을 쓰는 일 또한 그랬다. 글을 쓰고 싶은 그 마음이 우람하기보다는 야트막한 것이라 여기며 스스로 부끄러웠다. 앞으로 뭐가 됐든 글을 써야겠어, 가 아니라 글을 써야 할 것 같은데, 에 가까운 실낱같은 이 마음을 애써 눌렀다. 작고 여린 마음을 살살 보듬어 불씨를 살리려 하기보다는 후후 불고 짓밟아 꺼트리려 했다. 스며 나오는 마음을 차마 막을 길이 없어서 간신히 쓰고 난 밤이면 그다음 날 읽고는 눈 못 뜨게 부끄러웠다. 마침내 꿈을 이룬 사람들, 나는 영원히 닿지 못할 것 같은 자리에 반듯하게 서있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매끄럽고 튼튼한 동아줄-재능이든 배경이든 그 무엇이든-이 내려온 덕분에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 도달한 거라고 의심 한 톨 없이 생각했다. 내 앞에 놓인 것은 잡으면 툭 끊어지고 잡으면 툭 끊어지고 말 것이라 여겨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실패와 절망은 지겨웠고, 무엇보다 점선처럼 툭툭 끊어지는 걸음으로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이무진의 무대를 보며 이십 대의 나를 떠올렸다. 번듯하고 커다란 배가 아니면 아예 동네 강가에도 나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그때의 나와는 확연히 다른 사람. 용기와 배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으며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걸, 저 청년은 어린 나이에 이미 다 아는구나 싶었다. 아주 작은 징검다리를 디디고 마침내 자기의 바다 앞에 선 청년이 어느 때보다 멋지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주 작은 징검다리를 디디는 것부터

먼 데의 것을 섣불리 욕심내지 않고 눈앞의 것을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이 해낼 수 있는 몫을 성실하게 해내고 하루하루를 여실히 맺는 사람들. 걸음마다 성실한 땀방울이 맺혀 걸어온 길이 풍성하게 빛나고, 마침내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열매를 안고야 마는 사람들. 곧잘 먼 미래에, 혹은 무슨 짓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가닿곤 하는 나도 자주 생각한다. 그때 그 일을 성실히 해냈으면 어땠을까? 그때가 기회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저 그런 것들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좀 더 정성껏 해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씁쓸하고 안타까운 건 어쩔 도리가 없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며 서늘한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지 말라는 법이 없잖은가. 남들이 애써 이루어놓은 결과만 보며 부러워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차근차근 쌓은 하루치의 노력과 땀방울은 관심도 없던 그때의 나에게도 분명 '지금 충실하라, 당장 시작하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큰 것을 욕심내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시작하다 보면 기회가 오고, 그 기회를 갈고닦으면 빛이 난다고. 그때의 내가 모두 흘려버리고는 뒤늦게 줍기 시작한 보석 같은 말들이다.


인생이란 제각각의 경로를 거쳐 마침내 한데 모이는 산봉우리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글쓰기라는 길을 택한 것처럼, 저마다 걸어온 길이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걷다 보면 나름의 통찰이 생길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누르며 살아가기도 쉽지 않다. 막아도 막아도 새어 나오는 마음이 있다면 부디 외면하지 말고 잘 모아두었으면 한다. 그것이 설령 한 방울의 마음이라도, 한 방울의 마음이 차곡차곡 모이면 어느덧 강물이 되고 마침내 바다가 되어서 나를 멀리멀리 실어 나를 수도 있으니.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을 알까 나의 꿈을 알까
-조용필 <꿈>

멀리 있는 별은 나의 마음을, 내 꿈을 몰라 줄 수도 있지만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징검다리는 내 마음을, 내 꿈을 안다. 나의 온 마음과 꿈을 실어 내딛는 나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주고 있으니까. 시작은 번번이 두렵고, 쓰다 보면 처음 계획과 어김없이 다르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일을 나의 꿈으로 품고 살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내가 길을 걸었지만 나중에는 길이 나를 데려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아주 작은 것을 겨우 해낸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쓸 뿐이다. 오늘의 내가 지날 날보다는 확실히 얼마간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안심할 때마다, 글쓰기를 내 삶으로 초대한 것은 얼마나 잘한 결정이었는지를 거듭 확인한다. 이마저 없었다면 질투든 부끄러움이든 이무진의 무대를 끝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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