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Apr 14. 2021

그만두면 자기만 손해야


"회사에게도 저에게도 마이너스일 것 같아서요."

"그 말은 그만하시겠다는 뜻일까요?"

"네. 전 못할 것 같습니다."


팀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면접 볼 때 무엇을 물어보든 "자신 있습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으로 매듭을 짓던 이라 썩 미덥진 않았지만, 고사리 손이라도 절실했기에 꼭 뽑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회사 측에 이야기했다. 최소 두 명이서 꾸려야 하는 일을 혼자서 꾸역꾸역 해내다 보니 어느새 1년이 되어가던 차였고, 몸도 마음도 지쳤다. 지쳤다는 말을 되풀이하기에도 지쳤다. 지쳤다는 말이 내 안에서 닳아 너덜거렸다. 몇 개월 출근 전부터 퇴근 후 잠들기 전까지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 반복되었다. 머리카락이 쑥 빠지고 500원 동전 크기의 구멍이 생기나 싶더니 그 넓이가 차츰 심해졌다. 방바닥에 머리카락이 툭툭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아니 이렇게 살아야 하나. 대기업을 갔으면 좀 나았을까, 지난여름에 시나리오 작가가 필요하다며 급하게 들어온 제안을 거절한 게 실수였나, 지금 하는 일에 무슨 책임씩이나 지겠다고... 미련하고 의미 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지나간 과거를 애꿎게 들추며 나를 책망하기를 반복했다. 몸과 마음은 망가져가고 가까운 이에게 걸핏하면 짜증을 내던 차, 팀에 드디어 사람이 생겼다며 기뻐할 틈도 없이 그는 입사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못하겠다고 말했다. 말릴 수 없었다. 업무를 주면서도 말이 안 되는 분량과 스케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처리하면 퀄리티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라는 그의 말에 저도 안다, 저도 아는데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을 하고 있고 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라고 거듭 미안해하면서 말했다. 글 쓰는 이에게 글에 대한 자부심을 잠시만 내려놓으라는 말, 글에 대한 퀄리티를 고민하기보다 스피드를 고민하라는 말을 했다. 글 쓰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면서. 자신이 쓴 글이 종이에 인쇄되어 나올 때 마음의 부피와 무게감을 알면서. 잘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잘 알기에 나가겠다는 그의 말에 반대할 수 없었다.


일주일 전부터 출퇴근길 전철에서 최진영 작가의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를 읽 있었다. 스트레스로 쓰린 가슴을 움켜쥐며,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지구의 끝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에게서 나름의 위로를 구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창궐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날마다 살육과 강간이 행해지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인물들에게 깊이 이입했다. 소설 속 상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각자 자신의 황폐를 살고 있으니, 하루를 버텨나가고 있으니, 각자의 싸움을 하자고 마음을 다잡다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가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을 때 문득 소설 속 인물들이 떠올랐다. 그들처럼  역시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 같았다. 자신은 이 일로 인해 어떤 보람도 자부심도 가질 수 없으니 하지 않는 게 맞다는 말은, 그를 보호하는 단단한 철갑처럼 느껴졌다. 회사 일을 뜻대로 해보겠다는 사람 앞에서, 회사 일이 어디 뜻대로 되나요, 라는 말은 철갑에 간지러운 스크래치 정도도 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회사의 누군가는 금세 그만두겠다는 결정을 내린 그를 향해 '어리다'라고 일축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는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인가, 사지에 내몰리도록 방치하다가 결국엔 파괴하고 마는 사람인가. 몇 달 전, 퇴사 의사를 내비쳤을 때 팀장님이 나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만두면 자기만 손해야." 그렇다. 회사를 그만두면 당장 돈 만원이 아쉽고 절박하겠지. 그때 좀 더 참을 걸 그랬다며 퇴사 결정을 후회하겠지. 그렇지만 그만두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전쟁 속에서 숨고 또 뛰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인물들을 이야기를 차근차근 따라가면서, 늦었지만 이제 나 자신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폐허가 되었다면 그 조각이라도 그러모으고 싶었다. 지친 몸을 다독이고 마음을 좀 쉬게 하고 싶었다. 후에 당장 돈 일이만 원이 아쉽게 되더라도, '지금'을 살고 싶었다. 그의 단단한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일하면서 보람을 찾고 싶다, 일하면서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돈과 오늘을 바꾸고 싶지 않다 깃든 무언의 눈빛.


오늘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책을 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차창을 통과한 햇살이 책장에 부딪쳐 반짝거렸다. 출근해서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경력 5년 이상의 담당자가 실무를 하기도 전에 포기할 정도의 업무 분량과 빠듯한 스케줄에 대해서, 나의 힘든 몸과 마음에 대해서. 더 말하고 싶은, 실은 반드시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지만 말을 아꼈다. 다른 사람을 얼른 뽑아주겠다는, 늘 듣던 답을 들었다. 점심 때는 다른 팀의 누군가가 내게 커피를 사주며 몇 개월 전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만두면 자기만 손해예요. 저도 매일 제 선택에 대해서 책임지고 살아요. 그러니 대리님도 책임져야죠. 이 회사를 선택한 건 본인이잖아요. 아직 다니고 있는 것도 본인이고요. 대리님, 돈은 중요해요." 어제 들은 그의 말과 눈빛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책임지라는 말이 더해졌다. 돈을 위해 스스로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돈은 필요하다는 말이 뒤섞였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나도 진작에 그만뒀어야 했다고, 나를 지켰어야 했다고, 몸과 마음이 다 상할 때까지 버텨온 스스로의 미련함과 아둔함과 대해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나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면서 산다는 그 말이 나를 깨웠다. 나는 퇴사한 그와 다른 선택을 했다. 혹여 내가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항상 현명한 선택을 할 수도 없고 항상 바보 같은 선택을 할 도 없으니까. 현명함이 시간이 지나면 아둔함으로 의미를 바꾸기도 하고, 아둔함 역시 현명함이 되기도 하니까.


소설은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찾았고, 누군가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탈출을 포기하고 전쟁터를 헤매는 것으로 끝났다. 소설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멈췄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과 자신의 삶을 지켜나갈 것이다. 나도 나 자신과 삶을 지킬 것이다. 돈을 버는 방식으로 때로는 벌지 않는 방식으로. 때로는 내 글을 쓰는 방식으로 때로는 내 글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이 글은 최초의 독자 나를 위해서, 나에게 필요해서 쓰는 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면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