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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y 01. 2021

그리울 나의 집


어젯밤, 연희동의 랜드마크인 사러가마트의 화장실에서 찍어 올린 내 사진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서촌이네요. 부암동도 좋고요.

-연희동 컴백?

-울 동네^^

이삿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나의 근황에 인친들이 남긴 댓글이었다. 댓글에서 언급되는 서울의 이곳저곳은 결국 그들이 살고 있거나 살고 싶은 동네였기에 웃음이 났다. 어떤 연유로 자리를 잡았든 간에 저마다 그들의 생활공간에 애정을 묻히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중 내 마음을 묵직하게 만든 댓글은 쌍문동을 추천한 어느 약사님의 것이었다.

"전에 제가 살던 쌍문 집도 좋았는데... 일출이 참 멋진 집이어서 지금도 그리워요."

집과 좋다, 그립다는 말이 나란히 놓여있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집이라는 명사와 좋다는 형용사와 그립다는 동사가 나란할 수 있는 삶의 한순간을 가진 적 그가 못내 부러웠다. 나에게 집은 좋은 공간이었던 적이 드물고, 그래서 이렇다 할 그리운 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랬다.  


좋아하는 것들과

상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30분 일찍 퇴근한 뒤 서둘러 보러 간 집은, 내 상황에 알맞았다. 더 이상의 무리한 대출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었고 산책로도 가까웠으며 예쁜 카페가 많기로 소문난 동네였다. 집이 위치한 골목은 조용했고 내 또래의 여자가 혼자 살고 있었으며 내게 필요한 가전은 싸게 넘기고 가겠다고 했으므로 이만한 조건이 없다 싶었다. 이만한 조건이 없었다,라고 쓰는 게 맞았다. 집에서 조용히 글 작업을 할 수 있고 집에서 집중이 안되면 카페로 잠깐 옮겨 분위기 전환을 꾀해볼 수 있고, 그도 안되면 자박자박 산책을 하면서 글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음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으니. 그 정도면 더 바랄 조건이 없었다. 내일부터 주말인 데다 집을 보러 오기로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그녀의 말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이라도 디파짓을 거시겠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함께 집을 보러 간 애인과 눈짓을 주고받다가 계약 의사가 잔뜩 있다는 말과 함께 집 잘 봤다는 말을 하고 나왔다. 망설이다 이 집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내일 저녁 보러 가기로 한 연희동 집을 바로 보러 가기로 했다. 반나절만 망설여도 집을 놓치기엔 충분했다. 집은 없었고 내 상황에 맞는 집은 더더욱 없었다. 연희동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점심때 먹다 남은 도시락을 애인과 나눠먹었다. 몇 년 전 소개팅에서 본인 명의의 집이 있다는 걸 매력으로 내세운 남자가 문득 생각났다. 그때는 사람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으면 가진 걸 내세우나 싶었는데, 작년부터 이사 문제로 시름시름 골머리를 앓다 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연희동 집은 형편없었고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아까 집 보러 간 사람인데요 제가 계약할게요" 아무런 설렘도 기대도 없는 통화를 마쳤다. 새 집과 함께 산책로와 카페를 다 가지게 되었는데, 내 상황에 꼭 맞는 집인데 왜 이렇게 아무 감흥이 없냐는 물음에 애인이 답했다. "아직 얼떨떨해서 그래"


집도 정해졌겠다, 날짜도 얼추 맞겠다, 이사 견적을 가늠하러 우리 집에 처음 와본 애인이 기함을 했다. 짐을 버려야 할 것 같다고. 그의 표정은 짐이 아닌 집을 버려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번번이 집이 엉망진창이라는 이유로 방문을 거절하다 이사를 하긴 해야겠으니 어쩔 수 없이 오픈을 한 집주인에게 건넨 그의 말은 이랬다. 이 집의 짐을 절반 갖다 버려도 그 집에 못 들어간다 그냥 계약을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침묵 속에서 그와 마주 앉아 10분가량을 고민했다. 벽 한쪽을 다 채우다 못해 바닥까지 내려와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책들을 다 처분할 수 있을까, 매일 같은 옷만 입고 다니면서 행거에 걸린 저 수많은 옷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책상 한쪽에 쌓아놓은 무수히 많은 과자박스와 그 뒤의 창고 안에 쌓여있는 수많은 물건들.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가야 했다. 그녀에게 문자를 썼다. 집에 와서 짐을 가늠해보니 도저히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늦은 밤이라 문자로 대신합니다 죄송합니다. 발송 버튼을 누르려는 나를 그가 말렸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고민해보자. 잠시 뒤 나는 문자를 발송했다. 애인을 돌려보내고 나니 몸이 아파 출근 때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 누웠다. 정리되지 않은 삶의 민낯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인지,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지, 윤택하고 간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휘발던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다 얼굴에 파운데이션이 뭉쳐진 그대로 잠이 들었다.


포기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새벽에 일어나 누운 채로 부동산 앱과 카페를 검색했다. 어제 내가 올린 인스타 피드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게 된다'라고 적혀있었다. 그녀에게 계약하겠다고 전화한 직후에 올린 피드였다. 더 이상의 대출의 감행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도, 산책로도, 카페도 다 내 것이 된다는 기분에 취해 한마다로 팔자 좋은 소리를 늘어놓은 셈이었다. 내가 생각해야 할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좋아하는 것들 앞에서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그건 남들 눈에는 짐이고 버릴 것이라도 내게는 소중한 것이었다. 책을 아무리 정리한다 해도 절반이나 버릴 수 없고, 한 장 한 장 사모으고 써보지도 않은 접시를 기꺼이 남의 식탁에 올릴 아량이 없었다. 추리고 정리하고 버리겠지만 내게 여전했으면 하는 방의 구조와 쓰임이 있었다. 책을 위한 넉넉한 공간이 있으면 했고 작업 공간을 따로 두고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 삶의 골조 같은 것이니 그걸 다 뭉개면서 집에 나를 욱여넣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이 아닌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검색창에 넣었다. 조건에 부합하는 집 몇 채가 나왔고 이른 아침이라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통화를 원하는 상대방과 이런저런 사항들을 확인하고 저녁에 집을 보러 가기로 정했다. 한참 잠에 빠져있을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잠시 뒤 그가 몇 개의 링크를 더 보내왔고 냉동고에 처박혀있던 만두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리면서 지도 앱으로 여기저기를 찍었다. 오늘 저녁에 두 집, 내일 아침에 한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전입신고를 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도 타지는 타지다 싶고, 타지에 나와서 이게 뭔 고생인가 싶고, 그냥 가족들과 집에 살았으면 이 고생 안 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을 공식처럼 한다. 그리고 이 공식 뒤에는 어김없이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는 한 곳에 머무르는 안정감을 우리들에게 안겨주려 했다. 교사인 아버지의 발령지에 따라 학창 시절 내내 이사와 전학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는, 한 곳에 정착하며 생활과 인간관계를 가꿔나가기를 소망했고 그녀의 자식들에게 그 감각을 물려주며 뿌듯해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지내는 동안, 내겐 단 한 번의 전학도 없었고 이사도 거의 없었다. 엄마는 종종 "전학 안 가도 돼서 좋았지?"하고 확신에 찬 말투로 내게 물었는데, 전학을 가봤어야 좋았다 안 좋았다 판단을 할 텐데 줄곧 짜장면만 줘놓고 짬뽕 안 먹어서 좋지라고 묻는 셈이라 뭐라 대답할지 몰라서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짬뽕도 먹어보고 싶었다. 같은 맥락으로 내가 갓난쟁이일 때는 단칸방 몇 곳을 전전했던 것도 같지만 사진으로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고,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사라고는 중학생 무렵에 바로 옆집으로 이사 간 일이 전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옆집이라니. 시세 차익을 노려 집을 사고팔고 하며 요령 있게 돈을 불리는 일에 관심도 재능도 없는 엄마의 결정이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바로 옆집은 이상해 이사의 이유를 물었고 엄마의 답은 이랬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창문으로 옆집이 보이는데 그렇게 좋아 보이더라" 우리 집이 된, 그렇게 좋아 보이던 옆집의 작은 화단에는 해마다 어김없이 모란이 불꽃처럼 피어오르고 라일락이 흩날린다. 엄마는 그곳에 열대어가 헤엄치는 작은 어항도 놓아두고 철마다 이런저런 꽃을 돌보고 가꾸며 기꺼워하며 지내고 있다. 되려 어릴 때 이렇다 할 이동이 없었기 때문인지 나는 내 손으로 돈을 벌자마자 집을 나섰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와 꼭 같이 전학도 이사도 경험하지 않은 남동생은 어른이 되어서도 집에 꼭 붙어 지내며 여행도 거의 다녀온 적이 없는 걸로 안다. 그냥 이사를 자주 다니는 사람이 있고 자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있는 거겠지. 생활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새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나무처럼 붙박여 뿌리를 내리는 사람이 있는 거겠지. 어디든 나 하나 쉴 곳은 있을 것이고 그곳이 어디든 생활을 묻히면서 살겠지만, 애정을 묻히면서 살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실은 애정을 묻히면서 살 수 없다에 가까울 것이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앞세워 고른 집일 테니까.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손에 쥐려면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하니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생존이고 좋아하는 것들은 취향이니까. 케이크 시트 위에 부드러운 크림을 바르듯 생존 위에 취향을 부드럽게 올릴 수 있을 때, 그때야 비로소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가 나란한 한 문장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찾고 싶다. 그리울 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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