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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y 10. 2021

닉김찾아 삼만리(1)


집 헤는 밤

성수, 연희, 도봉, 사당, 용산, 수유 다시 연희. 꼭 열흘만에 글을 쓰며 그간 별 헤는 마음으로 헤집었던 동네들의 이름을 읊어본다. 하루 평균 두 집씩 애인과 방을 보러 다녔다. 살고 싶은 동네나 역세권 주변을 콕 짚어 집중적으로 훑는 것이 아니라 내 조건에 맞춰 돌아다녔으므로 그렇지 않아도 좁은 선택의 폭이 더욱 좁아졌고, 우리는 날마다 서울 이곳저곳으로 널을 뛰어야 했다. 이동거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한 지역에서 두어 군데의 매물을 보려고 동선을 짰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나. 오라고 해서 갔더니 집 앞에서 연락을 받지 않는 집주인 때문에 허탕을 치기도 했고, 집을 보러 가는 중에 집주인이 보증금을 급작스레 올린다거나 부동산을 끼고 하는 계약이 아닌데도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부동산이 집주인과 잘 아는 사이라며(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버젓이 중개수수료로 몇 십만 원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틈틈이 가볼만한 집들의 링크를 주고받으며 집주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했고, 보러 간 집이 마음에 들 경우에는 도배를 새로 해줄 수 있는지 청소나 수리가 가능한지 등을 가볍게 흥정했다. 녹음이 울창하고 시냇물까지 좔좔 흐르는 도봉에서는(빌라 이름도 '상록수'였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동네를 한 바퀴 휘돌며 정말 예쁘다고 감탄했지만, 속세냐 자연이냐를 택해야 할 만큼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결국 포기해야 했다. 그 동네의 키큰 나무들만큼이나 짙푸르고 아득한 위치였다. 그렇다고 우울해할 것만은 닌 것이, 없다 없다 해도 발품을 팔수록 적당한 조건의 집들 드문드문 보였기 때문이다. 밤하늘에 별 하나 없다 싶다가도 눈이 어둠에 익으면 희미하고 작은 별들이 점차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퇴근 후 저녁에 보러 간 수유의 경우에는 모든 조건이 내게 알맞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했기에, 애인이 바로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 도배나 청소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집주인으로 부터 우리가 원하는 답을 받고 나서 근처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했는데, 쿠폰을 만드는 나를 보며 그가 "이 집으로 마음 굳혔나 보네"하고 싱긋 웃었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온 늦은 밤, 다행히 좋은 집을 찾았다며 박수를 치며 춤을 추어도 모자랄 판에 뜨거운 눈물이 온천처럼 솟았다. 내가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조건을 고루 충족할만한 집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마땅했지만, 나의 취향은 어느 하나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조건에만 충실한 집을 골라야 하는 이 상황이 새삼 서럽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내게서만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올해로 4년째 살고 있는 집도 순전히 회사의 급작스런 이전 때문에 덩달아 급하게 구한 집이었다. 좋다 싫다의 여지가 없었다. 다음 집은 반드시 내가 살고 싶은 곳이었으면 했건만... 수화기 너머로 훌쩍거리는 내 목소리를 들은 애인이 연유도 모른 채 나를 달랬지만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좁고 깊은 서러움에 새벽까지 잠 못 들던 나는 부은 눈으로 부동산 앱을 켜고 아름다운 집들을 골라보기 시작했다. 욕심을 낸다면 갈 수야 있겠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는 어림도 없는 집들이었다. 이열치열, 서러움엔 서러움. 이왕 못 갈 거라면 내가 가고 싶은 집들만 보자, 정신승리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집들을 살폈다. 개 중 몇 개는 실제로 가서 집을 면면을 살피고 요리조리 뜯어보고 싶을 정도로 맘에 들었다. 창문을 열고 닫으며 창문 밖의 풍광을 살피고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며 해가 얼마나 드는지 구경하고 싶었다. 집 보러 온 사람에게 당신 주머니에 얼마나 있느냐며 타박할 집주인은 없을 테니까.


그놈의 '닉김'

"지금까지 본집은 어딜 봐도 딱 내가 살집이다, 하는 느낌이 안 들어서..."

"그런 집은 없어. 몇 억짜리 집이라도 처음에 만족하겠지만 살다 보면 불만은 생겨"

수유 집에 대한 결정을 유보하는 한편 내 나름대로 맘에 드는 집의 링크를 그에게 두어 개 보냈다. 그는 링크를 확인한 뒤 일전에 그가 나에게 말했던 집이며 교통이 불편하고 주위에 숲밖에 없며 반대했다. 여태 봤던 집들은 아무래도 내 집 같은 느낌이 안 든다는 내 말에 돌아온, "그런 집은 없다"는 단호한 그의 대답은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런 집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집이 없다니,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발목에서 찰박거릴 정도의 얕은 우정으로 지내온 몇 년간의 친구 기간까지 고려하면, 나를 나름 잘 안다고 믿었던 네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원더랜드를 꿈꾸는 게 아니었다. 집 안팎이 반짝반짝하고 주위는 나무가 포근히 감싸 안은 듯 자그마한 숲에 둘러싸여 쾌적하고 청량한 풍광을 자랑하며 지하철 역에서도 가깝고 근처에는 아름다운 카페까지 있는 집을 찾는 게 아니었다. 단점 없는 집이 아니라 살고 싶은 느낌이 드는 집을 찾고 싶은 거였다. "그런 집은 없다"에 대한 나의 반박이 결국 큰 말다툼으로 번졌다. 조건에 맞는 집을 찾아놓고도 미적미적 미루는 내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의견과 집은 조건으로만 선택할 수 없으며 집과 사람 간에도 반드시 인연이 있다는 내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두 사람 사이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못해 끊어지기 직전에야 우리는 극적인 화해를 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 그가 미안한 마음에 내가 좋아할 만한 몇 개의 집을 찾아 링크를 보내주었고, 나 또한 '그놈의 느낌'을 찾는 건 포기하고 그가 집주인과 흥정까지 해가며 조건을 갖춰놓은 수유로 가려고 웬만큼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가 보내온 링크 중 한 곳이 연희동이었다. 연희동에서 내리 8년을 살다가 급작스레 떠나온 만큼, 내게 연희동은 언제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다. 다른 동네였다면 가보지 않고 바로 수유로 결정을 했겠지만, 연희동으로 가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유로 가서 계약을 하기로 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비바람이 휘몰아칠 거라 했지만 햇빛이 눈부신 어린이날이었다.


수유를 먼저 들렀다. 집주인에게 연락해 낮에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해두었고 세입자가 부스스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창문을 열면 하늘 대신 담벼락이 마주하고 있었다. 같은 회색이라도 이제는 담벼락 대신 하늘을 보고 싶었고, 넉넉하진 않더라도 부족하지 않은 햇살이 바닥에 닿았으면 했다. 수유 집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점이 바로 채광이었는데, 맑은 날에 들러 확인해보니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할 정도로 해가 잘 들었다. 세입자가 스위치를 딸깍딸깍하며 불을 켜나 안 켜나 별 차이가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었다. 내가 살 집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 건 여전했지만 더 이상 느낌 운운했다간 이 집조차 놓쳐버릴 가능성이 충분했다.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하며 채광만 잠깐 확인하고는 연희동으로 향했다. 지난 주였나, 퇴근 후 집을 연거푸 두 채 본 적이 있었다. 성수 집을 보고 나서 연희동 집으로 향했는데, 예전 살던 집도 오르막이었지만 그 1.5배의 오르막을 올라가야 하는 데다 차를 몰고 가는데도 경사가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파랐다. 그 뒤로도 연희동 집은 간간이 나왔으나 내 조건에 맞는 집들은 모두 급경사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새로 보러 가는 집에도 큰 기대가 없었다. 오르막이거나 집이 별로이거나 등기를 확인하면 문제가 있거나. 큰 기대가 없었던 만큼 집 앞에 도착했을 때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골목이며 시퍼런 칠을 해놓은 오래된 담장이며... 집을 내놓은 이에게 연락했고 그가 다시 실거주자인 어머니의 번호를 넘겨주었다. 어머니가 전화로 일러준 대로 담장을 빙- 돌 낡고 허름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수유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 느낌은 무슨 느낌이냐 느낌 같은 소리 한다 진짜. 잠시 뒤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인의 손짓을 따라 건물을 빙- 돌아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눈이 조금 커졌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애인의 표정도 나와 같으리라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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