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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pr 28. 2021

어제오늘 같은 메뉴


Day 1

점심시간. 식당으로 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같은 층을 쓰는 직원을 만났다. 밥 먹으러 간다며 눈짓으로 건너편을 가리키는 내 말에 그녀는 "거기 맛있어요?"하고 되물었고 "그냥 사람이 없어서 좋아요"라는 나의 답에 "사색하러 가시는구나. 맛있게 먹어요"하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사색이란 말은 내게 좀 거창하지 않나 싶으면서도 한 손에  책을 보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오겠다 싶기도 했다.


사무실 근처에 오니기리를 파는 작은 식당이 있다. 맛은 평범하고 양은 넉넉하고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살가운, 어느 동네나 있을법하지만 은근히 찾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한 식당이다. 오니기리 외에도 라멘이나 볶음밥, 소바 따위를 판다. 나는 이곳을 '많이 주는 집'이라고 칭하며 곧잘 가는데, 아주머니와 아저씨에게는 죄송하지만 점심시간에 들러도 붐비지 않는 데다(배달 오토바이가 많이 들러 다행이다) 삭막한 분위기를 만회해볼 목적으로 틀어두는 라디오나 음악 소리도 없다. 거리를 향해 문이 활짝 열린 구조라 오토바이 지나는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이고 나는 생활소음이 적당히 섞인 나른한 적막이 좋다. 양념을 좀 치자면 치앙마이의 어느 테라스에 앉아 망고주스와 볶음면을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멍하니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볼 때의 한적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태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오토바이 소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김치볶음밥을 시키는데 기본 간이  편이라 주문할 때마다 "아주 싱겁게요. 아주 싱겁게!"하고 얘기해야, 보통 간의 김치볶음밥이 나온다. 평소처럼 김치볶음밥을 주문했다. 그릇과 수저가 달각달각 부딪는 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다. 우리 집에서도 쓰는 2구짜리 가정용 가스레인지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드는 아주머니의 뒷모습과 곁에 멀거니 서서 거리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는 아저씨의 모습도 가끔 살피며 밥을 먹다. 이 부부는 처음에 무슨 일을 했을까, 식당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손님이 없는 이곳을 좋아하면서도 부부의 생계가 한편으론 걱정되어 꺼내지 못할 질문을 숟가락에 담밥알과 함께 삼켰다.


Day2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이들이 찌개를 함께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오늘의 김치볶음밥은 반드시 현금으로 계산하겠다는 각오가 있었기에, 몇 초 망설이다 혼자 먹겠다는 뜻으로 대답 없이 웃었다. 어제의 횡단보도를 지나 문을 열고 들어선 가게는 오늘도 한산했다. 오늘부터 에어컨을 켜느라 유리문을 닫아두어 거리의 소음이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게 입구 반대편으로 난, 주방과 연결되는 문 바깥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아저씨를 볼 수 있었다.


어제는 간간이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를 타고 몇 년 전 태국 여행의 기억까지 닿았다가, 그로부터 또다시 두어 해 전의 대만 여행을 생각해내고는 어떤 소설의 첫 장면을 몇 줄 적었다. 어제의 그 자리에 앉아 "많이 싱겁게 해 주세요"라고 주문했다. 오토바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늘은 무얼 써야 하나. 밥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겨보려는 나, 너덧명의 남녀가 우르르 들어오는 바람에 무얼 더 고민해볼 새도 없이 가장 구석 자리로 자리를 바삐 옮겼다(가게가 좁아 테이블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손님이 들어온 순서대로 한 줄로 앉아 먹는 구조이다). 한 칸을 띄워 곁에 앉은 남자의 스킨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아주머니는 "아휴, 손님들이 이 많대서 적게 넣는다고 넣는데도 이 손이 자꾸 뭘 더 넣네. 어제보다 덜 짜요?"라고 말을 보태며, 어제보다 훨씬 짜고 양이 많은 김치볶음밥을 건넸다.  술 뜰 새도 없이 또다시 두 명의 남녀 커플이 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가장 구석자리를 양보했더니 무리와 무리 사이에 끼게 됐다. 손이 닿지 않는 커플을 대신에 물병을 건네주고, 양옆으로 자리를 좀 더 만들어주고 하다가 결국에는 밥을 절반쯤 채 못 먹고 일어났다. 불편하게 밥을 먹다 일어나는 나를 보고 아주머니가 미안하다고, 점심시간에는 이렇게 손님이 몰릴 때가 있다고 말했다. 싱겁게 해 달라는 음식에 소금을 거듭 넣는 버릇처럼,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두어 번 더했다. 미안해요 아이고 미안해. 장사 잘되시면 저도 좋아요, 하고 답했다. 손님들 등과 벽 사이의 비좁은 틈새를 겨우겨우 지나 카운터의 아저씨에게 오천 원짜리를 내밀었더니, 그가 반색하며 쿠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다면 진작 현금으로 드릴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쿠폰이 없다고 답했더니, 그가 서랍에서 쿠폰을 꺼내 도장을 찍어 내게 건넸다. 카운터에 적힌 문구에 따르면 현금 계산 시 삼천 원에 도장 하나였는데, 건네받은 쿠폰에는 도장 두 개가 찍혀있었다. 쿠폰 안에 오니기리가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웃음이 났다. 이걸 언제 다 채우나 싶었지만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주, 오래가고 싶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고 가게가 갑작스레 문을 닫을 수도 있고 그 밖의 어떤 이유로든 쿠폰에 그려진 사십 개의 오니기리를 다 채울 가능성보다는 채우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것 같지만.


어제와 오늘 점심. 나는 이곳에서 김치볶음밥을 시켜놓고 비로소 글을 썼다. 출간 임박한 교정본을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것은 지치고 지겨워서 꼴도 보기 싫은 한편, 지금 수준이 흡족하지 않아 한 달만 더 달라고도 하고 싶었다. 글쓰기는 저만치 밀어두었다. 이렇게 밀어두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쓸 수 없고 쓸 말이 떠오르지 않고 써야겠단 의욕도 없이 일주일이 넘도록 있다가, 멍하니 앉아 김치볶음밥이 나오길 기다리다가, 아 그래 정 쓸 말이 없으면 김치볶음밥 주문한 이야기라도 써볼까, 하고 쓰기 시작했다. 첫째 날에는 더 이상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몰라서 그만뒀다. 그다음 날에는 김치볶음밥이 또 먹고 싶기도 하고 쓰던 이야기를 이어서 쓰고 싶어서, 어제처럼 조용하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단 한 줄도 쓸 수 없이 붐비고 바빴다. 그래서 붐비고 바쁜 식당 풍경에 관해 썼. 글을 쓰며 쿠폰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많은 오니기리를 들여다보며, 앞으로 쿠폰을 다 채울 수 있을 때까지 부부가 나의 무수한 좌절과 회복을 기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심히 김치볶음밥이나 한 그릇 시켜놓고 불 앞에분주한 아주머니의 작은 등과 바쁜 가게 안의 리듬과는 묘하게 반박자 느린 아저씨를 바라보면서 간간이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에 지난 여행 생각도 했다가, 좀 짜고 양이 많은 김치볶음밥을 한술 뜨면 글이 쓰고 싶어 질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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