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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y 19. 2021

반려


고양이 이야기

며칠 전,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꼭 흘 전에 애인이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얻게 됐다. 어미 고양이가 떼놓고 간 새끼 고양이를 임보(임시보호)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지인이 전한 것인데, 평소에 고양이를 워낙 좋아하는 데다 언젠가는 한번 키워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던 그라 소식을 듣자마자 얼굴에 기쁨이 피어올랐다. 지인이 소식을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전한 바람에 그에게 임보의 기회-입양자가 나타날 때까지만 임보를 하게 된다는 지인의 말에, 그는 자신이 입양하면 안 되느냐며 키우기도 전에 입양자가 나타날까 봐 걱정까지 했다-가 오지 않을 뻔했지만, 다행히 그가 임보하게 되었고 우리는 다음날인 일요일에 폭우를 뚫고 새끼 고양이를 데리러 갔다. 고양이는 케이지 안에 담겨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울음이 새어 나오는 틈새로 작은 털 뭉치가 보였다. 조수석에 타고서 집으로 향하는 동안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진 케이지 안의 고양이를 자주 들여다봤다. 고양이는 불안한지 쉴 새 없이 울었고 우리도 불안하고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고 나 또한 고양이에 대한 지식이라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고 칭한다는 것 외에 없었으니, 새끼 고양이가 왜 우는지 혹시나 임보 기간에 무슨 탈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마음이 콩닥콩닥거렸다.


나는 초등학교 삼 학년 때 시장에서 오천 원 주고 사온 강아지 한 마리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강아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고, 그 강아지를 보내고 나서도 다른 강아지를 얻어와 길러보려고 할 만큼 강아지를 좋아했다. 한마디로 '개파'였던 내겐 고양이에 대한 호감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 집 화단을 활보하던 동네 고양이들은 한마디로 깡패에 가까울 정도로 무서웠기 때문에 고양이에 대한 인상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지에서 나와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는 새끼 고양이는 너무 귀여웠다. 내가 한걸음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배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면 그제야 울음을 멈추고 몸을 기대 왔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려서 슬프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보호자를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쓰레기봉투에 새끼 고양이를 산채로 넣어서 버린다는 뉴스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제때 보호자를 못 찾은 동물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것은 차마 생각할 수 없었다. 분유를 먹이라는 말에 작은 젖병을 들고 먹이려 낑낑대 봤지만 품에 안은 녀석이 자꾸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절반은 입고 있던 옷에 쏟아버렸다.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도 고양이의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 여태 고양이가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고양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사진을

 예의상 '예쁘다'라고 말한 적은 몇 번 있다-새끼 고양이는 원래 다 귀여운가 하는 궁금증으로 처음으로 고양이 사진을 검색했다. 다양한 새끼 고양이들 중 어느 누구도 녀석만큼 귀엽지 않았다. 이게 콩깍지인 건가 싶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판단해도 녀석이 압도적으로 귀여웠다. 데려온 첫날을 제외하고 또 한 번은 내가 보러 갔고 다른 한 번은 고양이가 보고 싶단 내 말에 애인이 우리 집에 데려왔다. 비가 연이틀 내려 꽤 쌀쌀한 탓에 전기장판을 틀어주었더니 고양이는 그 위에 몸을 올리고는 잠이 들었다. 가르랑거리는 고른 숨소리와 연하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작은 등을 보고 있으려니, 평화란 곤하게 잠든 고양이를 바라보는 순간이며 지금 맛보는 이 감정이 삶에서 감각할 수 있는 가장 순진한 행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따듯해서 잠든 고양이를 보며 한낱 인간이 보태는 생각이 잡다하다 싶지만, 이사다 촬영이다 뭐다 해서 요즘 부쩍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지쳐있었으니 잠든 고양이를 바라보는 순간이 절실했던 것 같기도 했다. 고양이 등을 보며 만족하는 나를 훈계하듯 마침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난 모임에 왜 빠졌느냐는 물음에 "길고양이 임시 보호를 하느라 못 갔습니다"하고 답했더니 "길고양이 보호는 훌륭하지만 더 귀한 시간은 모임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왠지 부아가 치밀어서 "어차피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면 경중을 따질 수 없는데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가요"하고 다시 답했다. 행복한 삶을 위한 모임이었다. 모임에 빠져서 고양이 등을 바라보는 순간보다 더 값진 행복을 놓쳤다면, 그 또한 내 몫이려니 하고 받아들일 참이었다. 선생님은 뭔가 다시 말을 보태는가 싶다가 말았다.  


강아지 이야기

곧 이사 가게 될 새집 앞에 펼쳐진 작은 공터와 산책로를 보곤 당연히 강아지 생각을 했다. 얼마 전 우연히 동물구조협회 사이트에서 한 유기견의 사진을 보게 됐는데, 눈이 참 예쁘고 반짝거리는 친구였다. 기간 내에 입양이 되지 않으면 안락사가 된다는 안내가 적혀있었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기에 키울 형편도 되지 않으면서 불쌍하다는 이유로 섣불리 데려올 수는 없었다. 부디 선한 보호자에게 입양이 되기를 바랐지만 며칠 뒤 걱정이 되어 다시 들어가 본 사이트에는 그 유기견이 안락사가 되었다는 안내가 적혀있었고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데려왔어야 하는 게 아닐까. 죽는 것보다는 외로운 게 차라리 나았으려나. 새집에서는 내가 조금의 부지런만 떤다면 아침저녁으로 산책도 시켜줄 수 있고 공간도 제법 넓어졌으니 강아지가 훨씬 편안해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 하루의 대부분을 강아지 혼자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강아지는 슬프고 외롭겠지. 오래된 친구는 이사를 간다는 내 말에 "행여 강아지 같은 건 키울 생각도 하지 마라!"하고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았는지 미리 엄포를 놓았다. 이효리처럼 돈 많고 시간 많으면 키워라, 강아지 끼고 시간 보내지 말고 얼른 결혼할 생각 해라, 친구들 중에 집에 동물 들였다가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애들 여럿이다 등의 잔소리는 옵션으로 이어졌다.


친구의 잔소리뿐만 아니라, 애인이 며칠간 작은 존재와 씨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일찌감치 강아지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두 시간마다 배고프다고 깨니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밥을 먹야 했 분유는 통 먹질 않으니 입에 맞는 간식을 사서 대령해야 했으며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울고 사람이 눈에 안 보이면 안 보인다고 울어대니 달래줘야 했다. 배부르면 놀자고 낑낑거리니 놀아줘야 하고 졸리면 졸리다고 낑낑거리니 재워줘야 했다. 밖에서 데이트를 두어 시간 할 참이면 나 역시 집에 혼자 있을 고양이가 걱정됐는데 그는 오죽할까. '애완'동물이 언제부터 '반려'동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땅한 대우라고 생각한다. 잠든 고양이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잠깐의 순간 동안, 인생은 그럭저럭 살만한 거라고 느꼈으니까. 이렇게 작은 존재도 열심히 밥 먹고 잠자고 살아가는데 나도 힘을 내서 살아야겠다는 위로와 용기를 얻었으니까. 내 고양이가 아닌데도 핸드폰 사진첩에는 고양이 사진이 자꾸 쌓여가고 사무실에선 가끔 모니터에서 눈을 거두고 사진첩을 보느라 웃고 마니까. '반려'의 뜻 그대로, 서로에게 짝이 되는 동무가 되어서 한쪽씩 어깨를 곁고 앞으로 타박타박 나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친구에게 "결혼하면 덜 외로워서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친구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외로움은 평생 가져가는 것이고 누가 해결해주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그러면 결혼을 왜 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 친구가 무어라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답을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강아지를 왜 기르고 싶을까. 귀여운 얼굴에 온 마음을 다 뺏겨서는 잠깐의 외로움을 달콤함과 맞바꾸고 싶은 걸까.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인생은 살아볼 만한 거라고 위무하고 싶은 걸까. 유기견을 구조하는 행위를 통해 정당함을 인정받고 싶은 걸까. 그를 통해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는 것만 가득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격미달이다. 아침 일찍 출근했다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에야 퇴근할 것이며, 산책은 힘드니 주말로 하자고 미룰 것이며, 놀아달라고 칭얼대는 작은 존재에게 책 써야 하니 방해된다고 저 리 가있으라 할 것이며, 기껏 놀러 간 카페 입구에서 반려동물 금지라는 안내를 보고는 깊은 한숨을 쉴 것 같으니까. 혹여나 아주 나중에, 강아지를 외롭게 하지 않고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강아지 이름을 '동무'라고 지을 것이다. 동무야, 부를 때마다 강아지와 내 삶의 모서리가 동그랗게 깎여나갔으면 그래서 우리 둘 다 동글동글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애인과 크게 다투고 돌아오니 나는 빈 방에 덩그러니 있는데, 그는 작은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을 것을 생각하니 몹시 화가 난다. 미래의 내 강아지 동무를 하루만 미리 빌려올 수 없을까. 오늘은 동무가 나를 좀 위로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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