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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n 16. 2021

좋은 것만 갖고 살아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인근 카페를 배회합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이사 후에 짐을 정리하면서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을 반복했다. 생각의 순도가 너무 오롯해 생각을 돌에 쏜다면 마치 레이저를 쏘는 것처럼 구멍이라도 뽕,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내 소원하던 이사를 드디어 하게 되어 너무 좋고 감사하다는 생각이었다면 좋았으련만 내가 한 생각은, 그러니까 이토록 힘들게 집을 구해놓고 기껏해야 내가 한 생각이라고는 "나는 왜 이럴까 아아 나는 왜 이럴까"였다. 이사를 한지 오일째 접어드는 오늘도 이 생각으로 하루를 연다.


스스로가 단점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장점이니 단점이니 하는 것들도 편의상 나눠놓은 것일 뿐 뭉뚱그려 한 사람의 특색이고, 보는 관점에 따라 장점이 단점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니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나의 어떠한 을 '단점'이라 규정짓고 마뜩잖아하거나 삭제하려 애쓰기보다는 이런 나를 좀 더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서서히 선회 중이다. 인류사에 거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 빛나는 이면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거늘 하물며 나 같은 일개 소시민이야. 그렇지만 보는 각도를 아무리 달리해도, 누가 보더라도 단점일 수밖에 없는 또렷한 나의 특질은 정리를 못한다는 것이다. 정리만 못하면 차라리 낫다. 제자리에 도로 넣으면 되니까. 정리를 못하는 동시에 찾던 물건이 어디 있는지 몰라 다시 사고, 이왕 다시 사는 김에 무료배송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혹은 1+1이나 2+1이라는 광고 문구에 혹해 여러 개를 산다. 새로 산 여러 개의 물건은 좀처럼 자리잡지 못하고-이미 포화상태다- 박스에 담겨 선반에 고이 모셔져 있기 마련인데, 그런 박스가 수십 개나 되니 내가 그걸 기억할리가 만무하고 그럼 또 물건을 애타게 찾다가 다시 사는 일을 반복하고 박스는 쌓이고 쌓이다 무너져 내리고... 아아, 이건 병이다.


정돈되지 않은 생활로 인해 모멸을 느꼈던 첫 순간은 일곱 살 무렵이다. 집에 돌아오니 내 책상 서랍에 든 물건 모두가 방바닥에 쏟아져 있었 행위의 주인인 엄마는 나가고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의 엄마는 터프하기로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말로 하기보다는 일단 매를 드는 타입이라 친구의 일 난 딸아이처럼 '엄마에게 그대로 갚아주기'를 시전 할 수 없었다. 마음이야 엄마가 쓰는 경첩의 서랍을 다 빼내어 립스틱이건 링 귀고리건 무슨 기념 주화건 그 안에 든 물건을 쏟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검은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써넣은 '사랑의 매' 쓰여있는 빗자루로 맞을게 빤했으므로 발을 동동 구르며 씨바아아알하고 소리를 냅다 질렀다. 빈집을 울리는 소리와 처음으로 이런 엄청난 욕을 입에 올렸다는 야릇한 쾌감 때문에 그 뒤의 기억은 없지만 그때 깊은 참회와 반성을 했다면 몇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집 전체를  모양으로 만들진 않았겠지. 온 공간을 물건이 뒤죽박죽 섞인 책상 서랍처럼 만들며 살아가다 보니 이런 인간이 되고야 말았다. 그때는 내가 책임질 영역이 고작 책상 서랍 하나였지만 이제는 방 세 개에 거실이다.


이사를 할 때마다 그랬듯, 이번 이사에서도 짐을 나르러 온 아저씨들이 학을 뗐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타이틀에 짐이 많고 책도 많습니다 라는 부제를 사전에 했지만, 막상 아저씨들이 마주한 광경은 타이틀에 대한       두 남자의 기대감을 순식간에 박살 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동숱하게 접했을 여자 혼자 사는 집의 평균과는 많이, 참 많이도 동떨어져 있었이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두 아저씨가 내뱉은 한숨과 푸념에 결국 사람 한 명과 트럭 한 대를 더 추가했다. 이사비를 아껴보겠다고 이미 넘쳐버린 쓰레기봉투 끝까지 버릴 것들을 욱여넣으며 아등바등했지만 결국 1톤 트럭 세대가 필요했다. 집 앞에 일렬로 늘어선 트럭에 실린 어마어마한 박스를 황망하게 바라보며, 이 집에 이사오던 4년 전을 생각했다. 그때도 짐이 많았고 짐을 나르러 온 아저씨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짐이 이렇게 많다며 를 내렀지만 그때는 1톤 트럭 한 대-물론 그것도 -로 감당이 됐었다. 4년간 짐 3배를 늘리며 나는 3배만큼 행복해졌나. 입지도 않을 옷과 있는지도 몰랐던 물건들, 사놓고도 어디 둔지 몰라 또 사길 반복했던 온갖 것들이 눈앞에 넘쳐흘렀다. 쓰레기를 돈 주고 사서 돈 주고 포장해서 돈 주고 버리는 풍경일 뿐. 이사를 도우러 전날 밤에 올라온 마가 "이걸 보고도 걔가 널 좋아한다디?"하고 질겁을 했다. 엄마가 날 가리켜 입버릇처럼 말하던 "지 외할머니랑 똑같아 가지고..."를 이번엔 반박할 수 없었다.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아파트 안을 잠식하고 있던 갖 물건에 둘러싸여 생을 보낸 외할머니가  나의 미래가 될지도 몰랐다.


나는 왜 이럴까, 라는 생각을 거듭하면서 나는 나의 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퇴근 후 이삿짐을 싸네 마네 하면서 이사 준비를 하느라 글을 쓸 수 없었지만 실은 이 상태로 글쓰기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작가란 무릇 내면의 더러운 것조차 꺼내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박은영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방마다 쌓인 거대한 욕망의 쓰레기들 바라봤다. 내면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눈앞에 더러운 것들이  외면할 수도 없는 존재감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한데, 그저 쓰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나는 쓸 수 없었다. 현재에 대한 불만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무언가를 사지 않고서는, 필요도 없는 그것들을 쌓아두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웠던 내면의 더러움을 차마 꺼내 보일  없었다. 날마다 쓰기를 해도 모자랄 판에 글쓰기를 밀어두다니. 내가 가진 단어들이 날마다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물리적으로 느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서 필요 없는 게 분명하지만 버리지도 못한 물건들-예를 들면 초밥집이 망하며 한 개 오천 원에 내놓은 일식용 도시락 서른 개-사이에 누워 망연자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왜 이걸 샀나, 그리고 왜 버리지 못하나. 자괴하고 또 자괴하면서.


쌓인 책도 내다 버려야 할 판에 주말이면 나는 정리 잘하는 법을 찾아 서점의 서가 사이를 헤맸다. 신발은 1인당 두 켤레이고 출근하는 남편은 4켤레, 북유럽 아가일 무늬도 집에 들이지 않는 엄중한 미니멀리스트부터 처음부터 다 버릴 필요는 없다는 저명한 정리 전문가까지. 정리의 팁도 각양각색이었다. 버리기 어려우면 모든 물건을 쓰레기 봉지에 넣은 뒤 쓸만한 것은 역으로 꺼내라는 부터 -난 버린 물건도 망설이다 봉투에서 도로 꺼낸 일이 잦다- 하루에 하나씩 무조건 물건을 버리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어느 것도 내게 닿지 못했다. 정리를 못하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말을 언젠가 얼핏 읽은 기억이 났는데, 외할머니가 그랬듯 나 또한 겁에 질린 사람일지도 몰랐다. 1+1, 반짝 쿠폰, 게릴라 세일이란 말에 현혹되어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담을 때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잠시나마 느꼈다. 정가에 살 것을 반값에 미리 사두는 현명함, 두 시간 동안만 사용 가능한 반짝 쿠폰을 가지고 평소 사고 싶었던 옷을 사는 알뜰함, 게릴라 세일도 놓치지 않고 쓸만한 물건을 낚아채는 순발력. 여기에 모든 지출을 신용카드로 하는 대책 없는 돈 관리까지.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소비자가 나였다. 다가올 미래에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싸게 살 수 있는데 안사면 나만 손해니까, 언제 또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현명하게 미래를 대비하는 이라면 충동에 시달리기보다 안전하게 통장에 돈을 보관할 것이다. 돈이야 말로 언제 필요할지 모르고, 다시 못 올 기회를 잡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니까. 어쩌면 나는 두려움을 보완한다는 명목 하에 두려움을 지속하고 증폭하기 위해서 불안한 소비를 지속해온 건 아닐지.


지난 주말에는 나의 거듭된 사양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한 분이 하루 종일 집 청소를 도와주셨다. 나는 체력이 달려 몇 번이나 누웠다 일어났다 했는데 선생님은 단 한 번 쉬지 않고 그 많은 쓰레기를 다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놓았다. 선생님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니 죄송한 마음도 덩달아 땀처럼 불쑥 솟았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그 많은 물건을 함께 정리해준 애인도 그랬고, 대구에서 부러 이까지 올라와 청소를 해준 엄마에게도 그랬고, 나의 정리되지 못한 삶이 나뿐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괴롭게 하고 있었다. 물건 더미 앞에서 한숨만 푹 쉬는 내게 선생님은 "정리할 수 있다 걱정마라"하셨고, 엄마는 다음에 올 때는 꼭 정리해놓겠다는 내 확답을 받고서야 내려갔다. 언제나 말끔한 집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애인 역시 이번 집에서도 그렇게 살면 가만 안 있는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놀러 오라고는 말해둔 상태이지만 과연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 많은 물건을 다 버리고 정돈하고 간명하고 간결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짐을 빼는 나를 보며, 이사 올 땐 이렇게 짐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묻던 주인집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기억할 뿐이다. "좋은 것만 갖고 살아" 때를 불문하고 나를 충동질하는 욕망에, 또다시 기회가 올 것 같지 않다는 두려움에, 하나라도 더 갖고 싶다는 허영에 맞서 사는 덜 사고 더 버릴 수 있을까. 모든 물건을 쓰레기 봉지에 넣고 시작하진 못하더라도, 눈을 감고 이를 악물며 하루에 하나씩을 강박적으로 버리진 못하더라도 내게 필요한 것, 내게 좋은 기분을 선사하는 것들과 살고 싶다. 이젠 그럴 때가 되었다.


(*) 오늘부터 다시 글을 씁니다. 차분환경에서 쓰는 건 아직까지 무리일 것 같지만 주머니에서 하나둘 흘렸던 단어도 다시 줍고, 생각도 정리하고 또 나누어야지요.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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