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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n 21. 2021

여성의 유통기한

친구들과 자전거 트래킹을 떠난 만 육십세의 엄마


며칠 전의 일이다. 퇴근 후 집 근처의 스타벅스에 들렀다. 이사 오기 전 어느 시간 대에 들러도 자리하나 잡기 힘들던 집 근처 매장과는 달리 고즈넉하고 산뜻한 인테리어가 단박에 맘에 들었다. 은은한 핑크와 그린으로 장식된 매장 이용객 대부분은 노트북과 음료 한잔을 테이블에 놓아두고 자기만의 리듬으로 토독토독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매우 흡족해하며 창가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펴는데 아뿔싸, 내가 앉은자리 대각선에 위치한 테이블에서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고성이 터져 나왔다. 흘끗 째려보니 아줌마들이었다. 아줌마들이란!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아, 했다. 여성 혐오와 나이 든 이들에 대한 혐오가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오라고 일컫기엔 거창하지 않나 하지만, 오의 시작도 처음엔 얕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곧 나의 미래가 되는 '나이 든 여자'에 대해 필터를 거칠 것도 없이 올라온 나의 감정에는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적 터부, 여성에 대한 비하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부끄럽고도 면목없지만 여성으로 삼십 년 이상 살아온 나는 아직까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스스로의 여성 됨에 대한 자긍과 ()를 가지기 전에 여자로서 하지 않아야 할 것들만 먼저 배우고 습득했기에 여성으로 자라면서 체감한 여성에 대한 감각은 "피곤하다, 억울하다"였다.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는 일이 도처에 너무 많았다. 남자라서 되고 남니까 묵인되는 일들. 여자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고 여자는 집에 일찍 다녀야 하고 여자는 남자 자존심을 세워줘야 하고 여자는... 금지의 여집합으로 여겨지고 길러진 성에 대해 자긍과 긍지를 갖기는 쉽지 않은 일 아니겠나. 취업을 위한 면접을 볼 때마다 "결혼 계획이 있느냐"에 대한 질문은 어김없이 딸려 나왔는데, 또래의 남자들은 이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적잖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우리 집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지만, 고작 한 살 차이 나는 동생의 밥을 내가 차려주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지거나 여자애가 무슨 서울을 가느냐는 식의 논리가 성립했던걸 보면 름 '깨어있으려' 노력했던 엄마조차도 여성으로 살아오며 체감한 여성에 대한 자타의적 시선을 예민하게 감지하진 못했던 것 같다. 이러한 환경에서 남성보다 보다 많은 여성이 심리적 결핍 호소하는 것은 무관한 일이 아니며, 결핍을 몸에 아름다움으로 보충하려는 열망은 자연히 뒤따르는 스텝처럼 여겨진다.


10여 년 전 연예인 하리수 씨가 "관리하지 않는 여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류의 말을 했는데, 그때는 본인의 노력으로 여성이 된 그녀가 대단하고 나 역시 '주어진 여성'을 잘 가꾸고 관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관리와는 거리가먼 스스로에 대해 겸연쩍은 마음까지 들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야 그녀의 발언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시선에 기인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몸에 대한 자유는 누구나 있고 그것을 보기 좋게 가꾸든 말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자 선택일 뿐이니.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몸에 대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나의 시선 또한 부지불식간에 타인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고 만다. 대학시절, 겨우내 집에만 있어 잠깐 살이 오른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친구가 내손에 쥐여준 도넛 두 박스를 받고 "이거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내가 돼지인 줄 알까 봐 걱정된다"는 말을 하며, 선물한 이가 응당 돌려받아야 할 인사 대신 황당함을 안기기도 했다. 검색창에 '광화문, 겨털, 붓글씨' 세 단어만 넣으면 어김없이 뜨는 7년 전의 뉴스를 가끔 읽으며, 광화문에서 '겨털 쇼잉' 시위를 벌였던 여인들을 떠올려본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불편함과 동시에 한편으론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음을 수긍하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며 살아간다. 


이 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성임을 피할 수 없는 동시에 또 하나 피해 갈 수 없는 일은 나이 드는 일이다. 서른이란 나이가 까마득해 보일 때는 그쯔음되면 내외면으로 뭔가가 갖춰져 있을 줄 알았다. 닥쳐올 미래에 대한 아득한 두려움 때문에 밤마다 눈물 흘리지도 않고 남들 으레 있는 집도 차도 남편도 자식도 다 있겠지, 싶었다. 막상 되고 보니 이게 뭐야.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차곡차곡 시간은 쌓여가는데 비질 한 번에 우르르 쓸려나갈 낙엽처럼 내가 보낸 시간은 어떤 의미도 밀도도 없이 그저 흘려보냈다는 박탈감뿐이고, 앞으로의 작업을 어떻게 해나갈지 한숨과 두려움이 범벅된 채로 살아간다. 으레 남들 다 있는 줄 알았던 집, 차, 자식, 남편은 개중 하나도 없고 남동생 상견례 자리에서 시어른 될 분들께 "사돈처녀 예쁜데 왜 시집 안 가요"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여자를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느니 어쩌니 하면서 속으로 발끈해보지만 결국 결혼 시장에서 내가 팔 수 있는 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이미 결혼 적령기는 지났고 적령기와 더불어 잠깐 찾아왔다 사라지는 리즈 시절 또한 저물어가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결혼해라" "멋모를 때 결혼해라" "재고 따지지 말고 결혼해라" "... 결혼해라" 하는 어른들의 말씀이 이제와 맞는 말인가 싶기도 한 것이다.


글과 일을 병행할 수 없어 몇 달 전부터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지며 쉽사리 퇴사 결정을 하지 못했다. 연봉 테이블은 턱없이 낮았고 이제는 무턱대고 쉽게 취업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연유든 회사를 우직하게 다니지 못하고 잦게 그만둔 나의 이력은 어느 면접 자리에서든 불리했다. 이때 내가 결혼한 사람이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알량한 생각도 해봤다. 부인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남편을 만났다면 생계애 대한 고민은 슬쩍 그에게로 미뤄둘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이사만 가면 때려치울 거야!"라는 말을 반복해온 나에게 가까운 이들이 물었다. 언제까지 다닐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오늘도 가만히 출근을 할 뿐이다. 여성으로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으로서, 나이 든 여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나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나이 마흔이 넘도록 영화를 하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이정은 배우처럼, 꿈을 좇는다는 명목 하에 생활의 궁핍을 견딜 수 있을까. 회사 때려치우고 돈 없어 맨밥에 김치만 먹으며 1년간 글썼더니 문학상 수상을 해서 길이 열렸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나에게도 그런 실력과 집념, 행운이 따를 수 있을까. 글을 쓰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회사 인근 카페로 출근해 글을 썼다던 박상영 작가의 기개가 내게도 있나. 지금도 퇴근하면 방바닥에 나동그라지기 바쁜데 원래 결심했던 목표처럼 '한 해에 한 권 출간'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무엇보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깊어진 사유와 고민의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을, 쉬지 않고 계속할 수 있을까.


결론은 (역시) 처음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버렸지만 이 글은 남자들은 여자를 모른다, 라거나 여자로 혼자 살기가 얼마나 억울한지 아느냐 등의 말을 하고 싶어 쓴 글이 아니다. 여성으로 살아오며 여성에 대해서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니 남자됨에 대해서는 더욱이 상상력이 부족하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젊은이건 또 나이 들어가는 이들이건 각자의 고투가 있음을, 숲의 색이 초록인 듯 보여도 가까이 다가가면 형용할 수 없는 온갖 빛깔들이 모여있는 것처럼 우리 개개인의 삶 역시 그렇다는 걸, 샅샅이 헤아리지 못해도 잊지 않고 살고 싶다. 개개의 빛깔을 뭉뚱그려 초록이라 말하기 전에 한 발짝 다가가서 들여다보는 여유를 갖고 싶다. 남들이 초록이라 가리키니 나도 초록이라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그들을 이해하고 만끽하고 싶다. 애초에 담소를 나누라고 있는 공간에서 아줌마니까 떠든다며 눈을 흘기는 행위부터 그만두어야겠지.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한 자기 고백적인 글을 쓰면서 투명하게 나를 반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아줌마'에 대한 부지불식간의 나의 혐오는 '아름답지 않은' 여성과 '기능을 잃어가는' 인간에 대한 경멸에 기인한다. 경멸의 기저에 깔린 두려움을 올바로 인지하고, 사회가 규정짓고 강요하는 아름다움과 기능적 쓸모에 대한 잣대를 거둘 때 나는 좀 더 여성다운 여성으로, 또 한 개인으로 이 사회에서 바로 서고 또 바로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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