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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n 22. 2021

귀엽죠?


점심시간에 자주 들르는 오니기리 가게는 나이 지긋한 부부 두 사람이 운영하고 있다. 사무실과 가깝지만 의외로 사무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메뉴도 다양한 데다 가격도 저렴하고, 결정적으로 매장 안이 좁아 사람 대여섯 명이 일렬로 앉으면 꽉 차기 때문에 왁자지껄하게 먹기 싫을 때, 혼자서 머릿속 엉킨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딱이다. 평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다 보니 아주머니와 아저씨 모두 나를 알아본다.


퇴사를 하나 마나. 점심 이후에 차장님에게 면담을 요청해두었는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그만두면 당장 뭘 먹고사나. 오늘의 결정을 내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고민이 깊어지니 가뜩이나 입맛도 없어 앞에 놓인 메밀소바를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데, 저 구석에 앉아있던 아주머니 두 사람이 주인아주머니와 말을 섞었다. 서로의 소식을 꿰고 있는 걸 봐서 가게를 곧잘 찾는 단골인 듯했고 좁은 공간에 손님이라곤 나 포함 셋이니 자연히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아주머니에 대한 정보도 업데이트되었다. 넉살 좋게 안부를 주고받는 성격이 못되어 주문한 메뉴가 나오면 가지고 간 책에 고개를 박고는 고요히 먹고 사라지다가 어느 날은 무슨 이유에선지 한산한 틈을 타 아주머니에게 "가게를 얼마나 하셨어요?"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십이 년이랬나 십오 년이랬나. 아무튼 예상보다 훨씬 더 된 시간에 고개를 끄덕끄덕할 뿐이었는데, 오늘의 대화로 개업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두 부부가 한 건 아니고 아주머니가 알바생을 두고 썼었는데, 인건비다 뭐다 해서 부담도 되었거니와 알바생들이 카페를 창업한다거나 병이 났다거나 등 일신에 일이 생겨 급한 대로 아저씨에게 며칠 도움을 요청한 것이 지금까지 계속된 것이라고 했다. 가게에 가면 복닥복닥 혼자 바쁜 아주머니와는 달리 아저씨는 왠지 좀 느긋하고 뭔가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는데, 아저씨 특유의 퉁명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그제야 이해되었다.


가게에 이런 일도 있었군,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그릇을 마주한 내쪽으로 주인아주머니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이거 너무 귀엽죠. 원래 얘한테 달려있던걸 떼서 심어준 건데  자라요 귀여워.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잎사귀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아주머니 눈꼬리가 예쁘게 접혔다. 아주머니는 음식 장사하는데도 환기를 위해 창을 열어놓아서인지 얘들이 잘 자라는 것 같다며, 내친김에 다른 화분도 가리키며 "이건 저 건너 미용실에서 얻어온 건데 거기서는 도통 안 자라다가 여기선 이렇게 잘 자라요."하고 말했다. 아주머니의 시선을 따라 화분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던 나도 "얘들도 맛있는 냄새 좋아하나 봐요"하고 말을 보탰다. 잠깐의 침묵 후에 "저 퇴사할 수도 있어요"했더니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기껏해야 한 두 가지일 나의 연유를 듣고 난 아주머니는 아, 그랬구나 했고 나 역시 지금 당장은 아니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녀라고 왜 힘든 날이 없었겠나. 2구짜리 가스레인지로 갑작스레 한꺼번에 밀려드는 손님과 배달 주문을 동동거리면서 쳐내느라 바쁜 날도, 도통 장사가 되지 않아 가겟세가 걱정인 날도, 그저 화초 하나에 마음을 기대고 하루 중 무시로 바라보고 귀여워하면서 지친 마음을 북돋아 지금까지 버텨왔을 것이다.


쿠폰에 도장 열개를 찍은 덕분에 무료 오니기리를 하나 받아 나왔다. 오니기리가 든 비닐봉지를 덜렁덜렁 손목에 끼고 사무실로 걸으면서 생각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아주머니의 화초처럼 귀여워할 만한 무언가가 내게 있나. 잊지 않고 물을 주며 반짝반짝 길러내고 싶은 게 과연 있나. 그런 게 없어서 회사 생활이 더욱 삭막하게 느껴지는 건가. 사무실 사람들과 점심도 같이 먹지 않고 술자리도 가지지 않고 농담 따먹기도 잘하지 않고 그저 모니터만 바라보며 키보드만 두드려대고 있어서 그런가. 회사 생활이야 그렇다 치고 내 삶에는 귀여워할 만한 구석이 있나. 예전에는 마음을 온통 뺏길 것들이 차고 넘쳤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정체모를 적에게 귀여움을 빼앗겨버린 것 같아 씁쓸했다. 유튜브다 밴드다 이것저것 해내려 하다 보니 삶의 태도는 어느새 '존버'가 된 지 오래고 때로는 내가 이걸 좋아서 하는 건가 의문이 들 정도로 쁘게 바쁘게만 지내오고 있었다. 오니기리가 든 비닐봉지를 손목에 끼고 덜렁덜렁 사무실로 돌아와 차장님과 면담을 했다. 지친 것 같으니 휴가 좀 다녀와요 갔다 와서 다시 얘기해. 지금이 한참 힘들고 흔들리는 시기가 맞다는 차장님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회사 생활이 내 삶의 귀여움을 앗아간 원흉 같아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인데, 그만두고 나서도 여전히 귀여워할 만한 구석이 없으면 어쩌나 두려워 고개를 끄이고  것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 퇴사를 고려하고 있다는 나의 말에 생계는 중요한 것이니 한번 더 생각해보라며 나를 만류하던 이가 마침 안부를 걱정하며 전화를 걸어왔다. 면담까지 했지만 잘 모르겠다고,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고 어떤 선택이든 두려워만 하는 내가 왜 이렇게 못났냐며 한숨을 쉬는 내게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을 좀 주세요"하고 말했다.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여행도 좀 가고 좀 쉬라고. 집으로 초대할 테니 저녁을 먹고 가라는 다정함에 날 선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그래, 먼저 나를 귀여워해야 이 세계를 귀여워하지. 고작 사는 자리를 옮겨 뿌리를 내렸을 뿐인데도 예쁘다며 손뼉 치는 그 마음을 내게로 돌릴 때다. 굵직굵직한 일들을 무탈하게 잘 해내고 있으면서도 남들이 칭찬하면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에요" 하고 딱 잘라 말하고, 이사 때 실수로 놓고 온 부엉이 풍경을 거듭 생각하며 한번 더 챙기지 못한 나를 틈만 나면 원망하고, 신용카드를 없애겠다고 단칼에 잘라놓고는 막상 이사하고 나니 사들일 물건이 많아 왜 이렇게 성급하고 앞일을 생각하지 못하느냐며 나를 자꾸 타박하지 말고, 쌓지 못하는 신용카드 포인트를 더는 아쉬워하지 말고, 나. 나를 좀 귀여워해야겠다. 지나고 나면 별일이 아닐 텐데. 부엉이 풍경도 신용카드 포인트도 아직도 못 찾은 나무 그릇도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줄 것들이 아닌데, 내 곁에는 오로지 나 하나만 끝까지 있어줄 텐데 말이다. 지금은 시들시들하지만 힘껏 귀여워하다 보면 가게에서 본 작은 잎사귀처럼 내 한 귀퉁이에도 매끄럽게 빛이 돌고 촉촉함이 스며들 수 있겠지. 친구가 하루에도 수십 장씩 조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이빨이 토끼 모양이라서, 낮잠을 잘 자서, 잘 웃어서, 볼살이 통통해서 귀엽다 귀엽다 하는 것처럼 나도 나의 대단찮음을 기꺼이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져봐야겠다. 어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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