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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l 02. 2021

잘 쓰세요!


전 세입자가 버리고 간 콘솔에 당근에서 얻어온 거울로 완성


이사 후 당근 마켓의 매력에 뒤늦게 푹 빠져있다. 주위의 많은 이가 당근을 외칠 때, 퇴근 후 전철역에서 만나기로 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사를 준비하며 온갖 것을 다 내다 팔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렇구나 했다. 중고거래라면 온라인 중고거래의 터줏대감 격인 네이버 카페 '중고나라'를 몇 번 이용해 본 적 있었지만, 올라온 물건들 중에 내 취향에 꼭 맞는 물건이 있는 경우가 잘 없었던 데다 막상 받아보니 사진과 다른 적도 여러 번이라 어느 순간부터 중고거래는 피하게 됐다. 돈 좀 더 주고 내 맘에 드는 거 사서 쓰라는 입장이었으니, 중고거래 플랫폼을 사용자가 사는 동네로 좁힌 들 뭐가 그리 달라질까 싶었던 거다. 내가 사는 동네에만 내 취향의 물건들이 그득할 리도 없고.


역시 나는 사업 머리가 없었던 건가.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하는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삿집에 캠핑의자를 놓기 위해 유행 지난 스타벅스 캠핑의자를 찾아 헤매다 당근마켓의 문을 두드리게 됐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캠핑의자를 비롯해 꽃병, 원목 테이블, 의자, 거울, 화분 받침대, 스탠드를 사들였다. 돈을 주고 산 것이 대부분이지만 운 좋게 무료 나눔의 기회를 얻어 들이게 된 것도 있었으며, 마침 사려고 눈여겨보아 둔 스탠드는 당근 마켓에 매물로 올라와있어 정상 판매가보다 2만 원가량 싸게 구입했다. 판매자가 제시한 가격표 옆에 '가격 제안 가능'이라는 알림이 붙어있을 때는 혹시 좀 더 깎아줄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지 않았다. 전국을 상대로 하는 중고나라보다 판이 협소하게 좁아졌는데도 오히려 내가 찾는 물건들이 왜 더 많아진 건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 동네에 모여 살지 않는 이상 그 묘한 이유를 알 수야 없었지만 마침 내가 찾던 튼튼한 원목 테이블이, 마침 전에 살던 사람이 놓고 간 콘솔과 같은 사이즈의 거울이, 오래된 집의 갈라진 창틀 모서리를 가려줄 만한 높이의 화분 받침대가, 마침 내가 찾던 디자인의 휴지통이(그렇다. 나는 내일 휴지통 거래를 하러 간다), 마침 지난 주말에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식물이 모두 당근마켓에 나와있었다. 이쯤 되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온갖 이유를 붙여 좋아할 만한 사람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확신하는 과정처럼, 당근마켓에 나온 물건이 마침 내가 찾던 것이 아니라 당근마켓에 나온 물건에 내 마음을 끼워 맞추고 있는 중인지도. 이사 때 정리하지 못한 짐을 눈물을 흘리며 버리는 와중에 또 당근마켓에서 이것저것 사들이는 나의 움직임을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이걸 보면 이게 필요했다 싶고 저걸 보면 저게 필요했다 싶었다.


필요한 물건을 싸게 살 수 다는 장점도 있지만 사람들이 뭘 파는지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디로 세시까지 오는 분에게 파 초록 부분 5kg를 무료 나눔 하겠다거나, 음식을 실수로 이인분 시켰으니 따뜻할 때 얼른 싸게 가져가라는 이야기 앞에선 웃음을 짓게 된다. 차량이 없다는 내 말에 가까운 거리이니 퇴근길에 가져다주고 가겠다는 선반 판매자의 호의도 고마웠다. 고민 끝에 결국엔 구매를 하지 않았지만. 기브 앤 테이크, 주는 만큼 받고 받은 만큼만 돌려주는 세태가 만연한 요즘 아직까지 이렇게 쓰임이 귀한 마음들이 남아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스탠드 판매자가 주소를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고생을 하게 됐는데, 건물 앞에 자신의 키보다 큰 스탠드와 함께 나와있던 판매자는 몇 번이나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내 손에 매실청 한 병을 쥐어주었다. 직접 만들었다며. 고생시켰으니 어련히 물건값을 좀 깎아줄 줄 알았거늘 나의 셈법이 너무 서늘했던 건가 싶기도 했다. 일반적인 중고거래와는 조금 다른, 주고받음의 행위 사이에 녹아있는 뜨듯한 온도조차 당근마켓 창업자가 애당초 예측하고 설계한 건지 사용자마다 '매너 온도' 점수가 매겨져 있다. 게임에서 상대방 레벨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고거래를 마친 당사자들은 시간 약속이나 대화 방식 등 서로의 이런 저런면을 간단하게 체크할 수 있는데, 온도가 높다고 이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거나 별다른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괜히 나의 온도를 1도라도 더 올리고 싶은 마음에 시간 약속은 늦지 않고 말 한마디라도 부드럽게 하려 애쓰는 나를 발견한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적 있는 매너 온도 99도의 동그리 님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협탁 기능을 대신 해줄 선반도 완성


돈의 쓰임도 여기서는 조금 특별해지는 것 같다. 카페에서 한 잔에 오육천 원 하는 음료는 척척 사 마시면서 멀쩡한 물건들이 단돈 만원, 이만 원에 거래되는 걸 보면 마음이 주춤거린다. 내가 사려는 물건의 값이 적절한지 고민해보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정말 이게 나에게 필요한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며칠간 침대 옆에 둘 마땅한 협탁을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당근마켓에서 발견한 협탁이 생각했던 가격보다 오천 원이 비싸 끝내 포기했다. 내가 포기한 사이 누가 낚아 채 가버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협탁을 두기보다는 값싼 선반에 얻어온 천을 씌워 쓰기로 결정했다. 비싼 물건 앞에서는 오히려 망설임 없이 카드를 쓱 그어버리면서 오천 원, 만원 앞에서 고심하는 내 모습이 이율배반적이지만 말이다. 새 집으로 이사 오면서 여기에는 무조건 노란 소파를 놓아야겠다고 찜해둔 자리에는, 며칠간 인터넷 쇼핑몰을 열심히 뒤진 끝에 맘에 드는 소파를 놓기로 했다. 쇼핑몰을 뒤지는 한편 당근마켓에 올라온 몇 개의 노란 소파를 물색했지만 색이 너무 밝거나 모양이 너무 각이 잡혀있어 끝까지 고심했다. 이십 대 중반에 출판사에 입사했을 때, 중고나라를 적극 애용하던 선배 하나가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중고나라로 거래한 물건을 택배로 보내기 위해 회사 안에 있는 박스 폐지를 모아 포장을 했고, 같이 길을 걷다가도 집 앞에 누가 내놓은 물건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궁상맞게 왜 저러나 싶었다. 새 것 좀 사쓰라는 나의 타박에 선배는 "너도 애 한번 낳아봐라. 그 밑으로 돈이 얼마나 드나!"라는 말을 했지만, 아직 결혼 전인 내가 이러고 있으니 사람일은 알 수가 없다. 나는 이사를 하며 집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돈 주고 사서 돈 주고 버리게

된)쓰레기를 보며 그제야 나의 과소비 행태와 물욕의 실체를 마주했고, 이제는 그런 습관을 좀 고쳐보기 위해 되도록 새 것을 사지 않고 값싼 것을 구해 써보자는 요량인데 출근길에도 자기 전에도 틈만 나면 당근마켓을 뒤지는 게 일상이 되고 보니, 당근 마켓이 또 다른 소비의 장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당근마켓 헤비 유저가 돼버렸지만 아직까지 내가 내놓은 물건은 하나도 팔지 못했다. 사놓고 한 번도 신지 않은 구두며 일 년에 한 번 켤까 말까 한 조명 같은걸 내놓았는데, 깎아달라면 얼마든지 깎아줄 의향도 있는데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 이사한 지 한 달이 채 안된 집은 이제 슬슬 있어야 할 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놓이면서 사람 사는 집의 형태를 갖추는 중이다. 중고에 중고를 더하며 가뜩이나 낡은 집이 한층 더 낡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집안을 휘둘러볼 때 이곳저곳을 채운 물건마다 깃든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어 즐겁다. 장미 한 다발이 쑥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화병을 가지러 간 밤의 기억도, 이 거울이 잘 보여서 버리기 아까웠다며 건네준 아주머니의 얼굴도, 냉장고 입구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 매실청도. 거래 후 헤어질 때 그들로부터 "잘 쓰세요!"하고 들었던 말은 잘 살라는 말로 들린다. 이제 더는 물건이 나를 잠식하지 않도록,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것이 자리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매만지고 가꾸는 것이 이 집에서의 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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