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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l 27. 2021

가까운 사람과 일하기


언제나 어렵다, 싫은 소리를 하는 것. 더 어렵다, 가까운 이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  멀리서 던진 돌보다 가까이서 못에 던진 돌이 훨씬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처럼, 같은 말이라 해도 가까운 이에게 듣는 소리는 여운이 오래간다.  역시 싫은 소리가 상대의 마음에 그리는 파동과 여운의 무게를 모르지 않기에 가까운 이들에게는 되도록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려 하고, 한발 나아가 싫은 소리가 나올 상황을 만들지 않는 데에 힘을 기울이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한 회사의 대표님과 오래 손발을 맞춰온 이에게 "좋으시겠어요. 대표님이랑 일할수 있어서"하고 말을 건넸더니 "존경할 인물은 멀리서 보는 게 좋죠"라는 대답이 단박에 돌아온 일은, 가까운 사이의 입장을 잠깐 헤아리게 했다.


공의 영역에 사가 개입하면 슬그머니 흐트러진다. 자칫 잘못하다간 공의 영역에 사가 개입한 것이 아니라 사의 영역에 공이 끼어든 셈이 된다. 나 또한 가까운 이들과 일을 할 때에 상대가 공과 사를 구분해주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공의 영역에 사사로운 친분을 끌어오는 실수를 종종 범했다. 실력으로 증명해야 할 것을 친분으로 퉁치려 한 이다. 그랬기에 업무적으로는 건조한 관계를 고수하는 편이고 가까운 이들과는 되도록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애인과 유튜브를 시작한 것은-나는 콘텐츠 기획과 진행 및 홍보를, 애인은 촬영과 편집을 전담하고 있다-가까운 사이이기 이전에 시작하자고 이야기가 된 사안인 데다 그간 큰 의견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흘러가겠거니 지레짐작하고 했던 것이다. 유튜브를 시작한 뒤로 서로가 엄청나게 싸웠던 것을 생각하면 과연 유튜브가 관계의 원흉이구나 싶었고, 다시 한번 가까운 이들과는 다만 담소나 식사를 나눌 뿐이지 결코 일을 함께 하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는 또 한 번 가까운 이와 일을 벌였다. 역시 유튜브였다. 애인이 급작스레 바빠지면서 잠시간 유튜브 촬영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는 콘텐츠 2개가량을 촬영하고 편집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고 상대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유튜브의 이응도 모른 채로 시작하겠다고 덥석 뛰어들었을 때, 촬영과 편집에 대한 지식을 알려준 데다 첫 촬영 때는 흔쾌히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와준 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흔쾌히 오케이 해준 상대에게 그저 고마움뿐이었다. 그 고마움이 미움으로 바뀌는데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을 걸 미리 알았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촬영 자체는 재미있었다. 상대가 촬영하기로 한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거나 벌여놓은 다른 일로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늦춰지는 일쯤은, 조금 언짢긴 했지만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바쁜 와중에 짬을 내서 도와주는 거니까, 우리도 그렇게 많은 돈을 보수로 지급하진 못하니까. 그런데 점점 상황이 이상해졌다. 당장 내일이 업로드인데 가편집본을 보여달라고 하면 아예 편집을 시작도 안 했다거나 영상을 보내기로 해놓고 기한을 넘기는 일이 잦았다. 처음엔 좋은 소리로 달랬다. 진지하게 임해줬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여전 상황은 변화가 없었고 싫은 소리 않고 상대의 일정을 맞춰주는 내 안에도 꾸역꾸역 화가 차오르고 있었다. 처음에 그가 호기롭게 제시했던 일정은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무리한 일정을 걱정하는 내게 그가 애당초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덜 미웠을까. "콘텐츠는 정기적인 업로드가 중요하니까 매주 하나씩 올리는 걸로 해요". 예정대로라면 7월에는 콘텐츠 네 개가 올라가야 했는데 내 손에 남은 것은 편집되지 않은, 조악한 영상 두 개. 영상을 받아본 애인은 기함을 했고 나 역시 몇 초 돌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영상은 결국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주말 내내 몸 바쳐가며 시간과 재료비 써가며 열심히 찍었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이 됐다.


영상을 보내주기로 하고 며칠간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이에게, 차오르는 화를 며칠간 눌러가며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 전화를 했다. 내게 돌아온 건 "죄송해요, 할 말이 없어요"라는 말 뿐이었다. 이어지는 레퍼토리는 뻔하잖은가. 죄송하면 다냐. 책임은 누가 질 거냐. 뻔한 레퍼토리는 서로의 감정만 건드리고 축낼 것 같아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변명할 말이 있었으면 좋겠어." 변명할 말이 없다는 그에게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사회생활의 첫걸음이라는 둥, 신뢰가 쌓이면 실력이 된다는 둥, 나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쓴소리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상대에게 결국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전화를 끊은 셈이 됐다(a.k.a꼰대). 전화를 끊을 무렵에 "그래도 마음은 상하지 말고, 잘 지내자"라고 이야기했지만 말하면서도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싶었다. 공적인 마음 따로 있고 사적인 마음 따로 있나. 일은 일로 끝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일 역시 감정이 좌우하는, 결국엔 사람이 하는 일 아닌가. 다시 애인과 유튜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또 싸우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먼저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의 감정이 극으로 치달았을 때는 썸네일을 여러 번 수정해달라는 내 요청에 그가 날더러 '갑질'을 한다고 비난했고, 회사에서도 수없이 수정하고 수정하는 게 업무인 나는 프리랜서인 그에게 '그래서 직장생활을 못하는 것'이라며 응수했다.


솔직한 의견으로 나는 가까운 사람과 일을 하고 싶다. 가까운 사이는 보다 쉽게 그 사람의 장점과 매력을 캐치해 업무효율을 올리기 쉽고, 감정적으로도 훨씬 너그러울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난날 몸 담았던 스타트업 직원의 대부분이 대표의 가족, 선후배였던 것은 아마 대표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믿을만한 사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과 일하고 싶다고. 그러나 가족도 선후배도 아닌 내가 바라보는 회사의 모습은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력이 있어야 할 곳에 대표와의 친분이 애매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믿었던 친구와 사업을 벌였다가 사기를 당했다거나 가족에게 믿고 맡겼다가 재산을 날린 연예인들의 이야기는,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가까운 사이와 일하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까운 사이와 잘 일하는 법은 무엇일까. 서로의 마음을 다칠 것을 조금 덜 염려하면서도 상큼하게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을까. 한 달치 유튜브 콘텐츠를 모두 날리고 못쓰게 될 정도로 치닫기 전에, 애초에 내가 크게 화를 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가까운 사이이니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말한다는 것이 되려 그에게는 고깝게 여겨졌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럽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집에서 밥을 해 먹고 수다를 떠는 사이였는데, 서로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한 마음은 내려두고 다시 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는 날이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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