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TV 채널을 돌리다 <나 혼자 산다, 안보현> 회차를 보게 되었다.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서 집 정리를 하는 장면들이 담긴 영상이었다. 그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집 도배를 하고, 직접 발품을 팔아 구매한 조명을 시작으로 집 안 곳곳을 자기 스타일대로 꾸몄다고 했다. 그의 인테리어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것도 잠시, 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생각 한 가지가 있었으니.
역시 연예인이라
전셋집에도 인테리어를 하는구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패널들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보통 전셋집으로 이사 갈 때는 인테리어 수리를 잘 안 하게 되지 않느냐고. 나 또한 언제 이사 가게 될지 모르는 공간에 시간과 노력,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다시 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란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라 패널들의 질문에 대한 안보현 씨의 대답이 더 궁금했다.
보통 전셋집에
2, 3년 정도 살잖아요.
2, 3년도 저한테는
소중한 것 같기도 하고.
그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직접 도배를 하고, 인테리어를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았던 이유는 돈을 많이 버는 연예인이어서가 아니었다. '자기 삶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던 거다. 잠시 머무는 공간일지라도 대충 살지 않겠다는, 내가 좋아할 수 있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보겠다는, 내 취향을 듬뿍 담아보겠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애정 어린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 온전한 내 집이 아니라고 해서 그 집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일 뿐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작년 봄, SNS를 구경하다 감성이 가득한 식탁 위 예쁜 화병에 반해 덥석 구매를 했던 적이 있다. 화병을 구매할 때만 해도 매일 아침 식탁 위의 꽃들을 보며 안구 정화를 하고, 꽃에서 나는 향기와 함께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현실은 어떠한가. '어차피 시들 꽃 사서 뭐해, 그거 치우는 게 더 일이야. 막상 돈을 주고 꽃 사려니 아깝네.' 결국 해가 바뀐 지금까지 화병만 덜렁 식탁 위에 올려져 있다. (가끔 연필꽂이가 되기도 한다. 허허) 예쁜 꽃을 보며 감탄하고, 꽃이 있는 공간을 발견하면 꼭 사진을 찍는 나인데 정작 내 공간에는 꽃이 없다.
그러고 보니 적당한 크기의 침대, 적당한 가격의 소파, 분위기에 적당히 맞는 식탁이면 되었다.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을 때에도 식탁 귀퉁이나 소파 구석 자리에 기대앉아있곤 했다. 남의 집이니 지금은 대충 공간에 맞춰 살자 싶었던 거다. 내 집이든 아니든 나의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인정하기 싫지만 공간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많이 닮았다. 정말 중요한 거 아니면 적당히 하자 싶고, 이벤트가 없는 날들은 대충 살고픈 그런 태도 말이다.
"잠시 머무는 곳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공간으로꾸미는 것.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사는 대신에 일상에 소소한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 그것은 아주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인생을 대하는 태도라 생각하면 그리 작은 차이는 아니다."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中)
두 번째 유산을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오래 머무르는 공간을 꾸미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무너진 내 마음을 온전히 들어주는 일기를 쓰기 위해서, 독서와 필사를 하고 싶어서, 어떤 존재로든 나라는 사람을 지탱해 줄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어서, 책상이라는 내 공간을 마련했다. 지금도 애정을 가지고 꾸며가는 중인데, 책상이 생기고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나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겼달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책상에 앉으면 다시 안정을 찾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부모가 되면 아기의 짐 속에 묻혀 자신의 공간을 잃어가기 마련이다. 식탁에서 그릇을 치우면 엄마의 책상이 된다는 웃픈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엄마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을 1/10만 덜어서 자기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육아 전쟁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잃어버렸더라도 다시 되찾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그런 공간을. 그리고 다짐해본다. 언젠가 엄마가 되고 육아에 혼이 쏙 빠지는 날들이 오더라도 내 책상만큼은 어떻게든 사수하겠다고.
엄마에게도 책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