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복덩어리 뭐 하고 있어요?
며칠 전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고 있던 내게 남편이 건넨 말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하고 올라가는 걸 느꼈는데 한 번 올라간 입꼬리는 좀처럼 다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짧은 몇 마디를 건네는 동안 내 머릿속은 '복덩어리'라는 단어와 '나'를 연결시키는 행위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일단 소파에 누워있던 내 모습을 묘사해 보자면 머리를 안 감아서 정수리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파김치 국물이 가슴팍에 진하게 물든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누가 보면 천연염색 체험 가서 만든 옷이라 착각할지도 모른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얼굴은 제멋대로 퉁퉁 부어있었다. 게다가 좀 전에 밥 얘기 좀 그만하라고 짜증도 한 바가지 냈었고, 여기저기 떨궈 놓은 옷들을 제발 제 자리에 정리 좀 해달라고 폭풍 같은 잔소리도 해댔는데 이런 나를 보며 '복덩어리'라는 말을 하다니. '남편이 갑자기 어떻게 된 건가? 남편이 원하는 게 있나? 무슨 일 있는 건가?' 온갖 생각이 들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마음속 걱정은 모른 채 눈치 없이 내려갈 줄 모르는 내 입꼬리를 남편이 보고야 말았다. "왜? 기분이 좋아?"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왜 갑자기 복덩어리라는 호칭을 내게 쓰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반달눈을 하곤 내 다리를 조물조물 주물러 주는 남편에게 차마 그런 질문을 할 순 없었다. "오빠가 복덩어리라고 불러주니까 괜히 기분이 좋네."
그냥 자기를 보는데
갑자기 복덩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 인생의 복덩어리.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응어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경험을 했다.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시는 남편에게 받았던 스트레스, 외벌이 하는 남편에게 가지고 있던 미안함과 눈치와 죄책감, 해가 갈수록 더 두툼해지는 내 몸뚱이에 대한 자격지심들이 언제 내 안에 존재했었냐는 듯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나 좀 괜찮은 사람이구나, 남편에게 힘이 되는 아내이구나'싶은 마음이 들어찼다.
'복덩어리'에 대한 여운은 진하게 남아서 연락처에 저장된 남편의 이름을 '우리 오빠♥'에서 '내 삶의 복덩어리♥'로 바꾸기에 이르렀다. 호칭을 바꿨을 뿐인데 만취와 늦은 귀가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남편의 전화를 친절하게 받아버렸다. (헐. 남편이 이걸 노렸나...?)
그러고 보니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우리 엄마다. 엄마는 나를 항상 '공주'라고 불렀다. 때에 따라 '우리 공주, 사랑하는 공주, 내 공주, 예쁜 공주, 큰 공주, 하나밖에 없는 공주'등으로 불렀는데 엄마가 날 부르는 호칭 덕분인지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진짜 공주인 줄 알았다.
"우리 공주는 얼굴도 엄청 작고, 코도 높고.."
"우리 공주는 살이 좀 쪄도 허리가 잘록하니까 볼륨이 있어 보이고.."
"우리 공주는 얼굴도 동안이고.."
"우리 공주는 피아노도 잘 치고, 달리기도 잘하고..."
그땐 몰랐다. 갈대처럼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뿌리의 근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 시간,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엄마였다는 것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과 기억하는 모든 시간들 속에서 엄마는 나를 '공주'라 불렀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딸,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내 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 우리 공주'
누구의 삶이든 그렇겠지만 나이 마흔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별 일이 다 있었다. 엄마의 품을 벗어나 독립을 하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 만큼 엄마와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엄마의 자리는 저만치 밀려났다. 내가 엄마를 잊는 시간만큼 '공주'라는 이름을 들을 시간도 줄어들었고, 엄마가 내게 주었던 소중한 마음들도 사라져 갔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 타인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젖어 살았던 시간, 한 발자국 내딛을 힘도 없어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고 살았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엄마가 나를 불러주는 시간들이 없었다. 아니, 내가 엄마를 잊고 살았다.
나는 엄마를 잊어도 엄마는 나를 잊지 않는다.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도, 일 년에 한 번쯤 얼굴을 들이밀어도 언제나 '우리 공주'라고 부르며 나를 반긴다. 나를 사랑으로 보듬어주는 마음,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마음, 단점보다 장점을 바라봐주는 마음, '넌 참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주는 마음. 그 모든 마음들이 '공주'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묻어 있다. 평생 잊고 싶지 않은 엄마의 목소리, 엄마의 마음.
난 엄마를 뭐라고 불러줘야 할까?
남편이 복덩어리라 부르면 내가 복(福)이 된 것만 같고, 엄마가 공주라 부르면 진짜 귀한 존재가 된 기분이 들듯 엄마를 위한 호칭을 만들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누구의 엄마가 아닌 '엄마 자신'으로서 존재했으면 좋겠고, 엄마를 참 괜찮은 사람이라 여기며 살았으면 좋겠는데 마땅한 호칭이 생각나질 않았다. 고민을 하다 엄마한테 물어보자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호칭에 대해 느낀 점에 대해 설명하며 물었다. "엄마~그래서 엄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엄마가 이제까지 널 공주라고 부르면서 키워줬는데, 호칭은 엄마가 정할 게 아니라 너희들이 고민해서 불러줘야 되는 거 아니니?" 엄마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콧물이 났다. 역시 우리 엄마다. (감동 바사삭 ㅋㅋㅋ)
엄마를 뭐라고 부를지 아직까지 정하지 못했다. 숙제가 되었지만 꼭 풀고 싶고 잘 해내고 싶은 숙제다. 엄마가 내게 그랬듯, 나도 엄마에게 표현하는 딸이 되고 싶다. 내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하다고, 엄마가 내 엄마여서 정말 행복하다고, 엄마는 참 귀한 사람이라고. 나를 공주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오래오래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