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 별로 업무 시간을 어디에 사용하는 지를 보면 해당 직무가 실제로 하는 일을 가장 직접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개발자라면 업무 시간에 코딩을하고, 디자이너라면 디자인 실무를 하며, 매니저라면 이런 실무자들과 소통하거나 실무자들이 개발이나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자신의 업무 시간을 사용할 것이다.
서비스 기획자로 일을 시작했을 땐 하루에 미팅이 많아야 1-2개였고, 나머지 업무 시간엔 담당하는 서비스의 상세 설계 문서를 치거나 운영 이슈를 확인하고 등록하는 업무가 주를 이뤘다. 스타트업으로 이직 후 product operation을 할 땐 실제 cs ticket을 처리하거나 이런 ticket이 더는 들어오지 않도록 product issue reporting을 하면서 하루가 바삐 지나갔고 나는 직접 오퍼레이션을 해야했기에 미팅에 할애하는 한 시간도 매우 아까웠다.
이제 클래스101에서 PM으로 일한지 1년째, 나의 구글 캘린더를 보면 PM은 커뮤니케이션이 주 업무라는 게 실감난다. 입사와 함께 마케팅, 재무, 법무, 디자이너, 개발자 등과 연속적인 티타임을 가지며 미팅의 포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지난 10월부터 올해 8월까지 나는 거의 매일 연속 미팅의 지옥 속에서 ‘주간엔 미팅, 야간엔 문서 작성’ 이 이 시대 PM의 주경야독 정도로 받아들여야하나 싶은 마음으로 회사를 다녔다.
그런데 이 모든 미팅이 반드시 영양가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참여하거나 진행한 대다수의 미팅은 머리를 맞대고 크리에이티브한 결과물을 뽑아내는 브레인스토밍류보단 ‘슬랙으로 얘기할 바엔 얼굴보고 이야기하자’류의 싱크 및 얼라인 미팅이었다.
해서, 대부분의 미팅에선 뭔가 새로운 걸 함께 창조하기보단 우리가 서로 같은 얘기를 하는 게 맞는지 초점나간 렌즈를 조율하는 듯한 미팅이 많았고, 그런 미팅이 끝난 이후엔 커뮤니케이션이 마이너스 지점에서 간신히 영점, 그러니까 잘해봤자 원점으로 돌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건 그렇게 긍정적이라고 볼 순 없었다.
또 싱크 및 얼라인 미팅류가 아니라면 비즈니스 팀의 프로덕트 요구사항을 쏟아내는 미팅에 다수 참석했다. 이런 미팅에선 내가 비즈니스 팀의 요구사항을 받아적기 급급했고, 돌아서서 회의록을 들여다보면 실제 그들이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도 되지 않았다.
‘왜 그런 요구를 한 걸까? 어떻게 제품을 사용하고 있길래?’를 물어봤어야 하는데 그 미팅이 끝난 다음 다른 미팅도 들어갔다 나오면 좀 더 파고들어야 하는 질문들은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하루의 모든 미팅이 끝난 다음엔 파김치가 되어 그 날 있었던 미팅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진득하게 팔로업할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한 채로 슬랙 스레드를 팔로업하다, 문서 작업을 좀 하다 머리가 꽉 막힌 채로 퇴근하기 바빴다.
8월말, 회사 비즈니스 모델 전환에 맞춰 정식 프로덕트를 출시했고 나도 그 타이밍에 그대로 방전되었다. 그로기한 상태로 출근하다가 입사 1주년이 다가오며 남은 연차를 소진하라는 HR메일을 받고 나는 별다른 계획도 없이 추석 연휴에 남은 연차를 갖다붙였다.
여행도 가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눈을 뜨면 양재천을 걷거나 뛰고, 끼니 때 밥을 챙겨먹고, 일찍 잠을 잤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면서 떠올랐다가 사라진 여러 잡념 중 가장 쓸모있었던 생각은 ‘미팅을 줄이자’였다.
동료들의 미팅 요청에 굉장히 관대했던 나는, 회사에 복귀하자마자 다른 사람이 되어 누군가 나의 비어있는 캘린더에 미팅 요청을 넣으면 미팅의 아젠다를 물어보고, 잡혀있는 미팅 시간이 아젠다에 적합한지 아니라면 한 시간으로 잡힌 미팅 시간을 반토막을 내버리는 깐깐한 사람이 되었다.
또 업무에 새로 도입한 룰이 있었는데 바로 No Meeting Thursday였다. 말 그대로 미팅이 없는 목요일이었는데, 구글 캘린더에서 목요일은 통째로 ‘방해 금지 시간’으로 설정해 누군가 미팅 요청을 보내더라도 자동으로 미팅 거부 메일이 보내지게끔 설정했다.
그렇게 회사로 복귀하고, No Meeting Thursday를 실천한지 3주차. 목요일은 내가 한 주중 가장 기다리는 요일이 되었다. 늘상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하루의 일정을 확인하며 이전에 어떤 논의가 오고갔는지 복기하고, 오는 미팅에선 어떤 공수를 펼쳐야하나 시나리오를 그리곤했는데, 목요일은 예외였다.
목요일은 버스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프로덕트, 스타트업에 관련된 아티클을 하나 더 읽었고,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사무실에 앉았다. 모니터에 맥 Monterey 보라색 화면이 밝혀졌을 때의 그 평온한 마음이란.
미팅이 한 개 밖에 없는 날일지라도 미팅에 앞서 회의록 등을 준비하는 시간, 미팅이 끝난 뒤 확인 사항을 체크하다보면 이후 실제 업무에 집중하기까지의 전환 비용이 꽤 든다. 목요일은 그럴 일이 없었다. 이제 목요일은 다른 요일에서 미팅한 내용을 찬찬히 되짚으며 큰 맥락을 다시 파악하거나, 업무 시간을 통째로 집중해서 작업해야하는 문서 등에 할애하며 개발자들처럼 Zone In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요일이었다.
No Meeting Thursday를 실천하면서 다른 날의 야근도 줄어든 건 덤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반드시 목요일인 오늘 당장 논의해야할 정도로 급한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목요일이 기다려진다는 점. 금요일 출근을 기다리는 직장인은 있어도 목요일 출근을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렇게 No Meeting Thursday를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의 요구사항을 위한 시간’ 이 아닌 ‘내가 우리의 프로덕트를 위해 깊은 호흡으로 고민하는 시간’으로 목요일을 인식하며 스스로의 시간을 존중한 것도 감사한 부분이다. PM이 자신의 시간을 존중하는 것, PM으로 오래 일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는 걸 체감하고 있다.
이제 관건은 앞으로 언제까지 나의 No Meeting Thursday를 사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어디까지 내가 양보할 것인가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