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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준 Mar 31. 2022

진공관 그녀

피넛 버터와 오후의 코끼리

 “그녀를 만났을 때 난 창작의 원천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어. 작은 아이디어라도 얻기 위해 갈라진 우물 바닥 속을 바가지로 긁고 있었다고. 하지만 난 이야기를 쓸 수 없었네. 무언가를 쓰려하면 마치 엉망으로 엉켜버린 실타래의 시작점을 찾는 기분이 들어 버려 쓸 수가 없게 되는 거지. 이야기를 쓸 수 없는 소설가라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하지만 그때가 바로 그런 상태였어. 모든 창의가 소멸되어 제로가 돼버린 상태. 난 라마즈 호흡법까지 익혀서 어떤 이야기라도 끄집어 내려했지만, 창작의 고통만 더해질 뿐이었지. 작가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린다고 생각했어. 왜 하트 크레인과 헤밍웨이가 자살을 선택했는지 이해되더라고”

 그가 말했다. 

 “난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네. 매일 밤 술집을 찾았고 머리가 깨질 때까지 위스키를 퍼마셨지. 그런데, 그때 그녀가 다가온 거야. 날 알아본 모양이었어. 그녀가 이렇게 말했지.”

 “혹시, 김박두 선생님 아니세요?”

 “그녀는 내 소설의 팬이라고 했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 10년 전 작품의 주인공을 언급하며,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작품이라고 말했지. 그녀는 말이야, 요즘 같은 트랜지스터 세상에 따뜻하게 세상을 감싸주는 진공관 오디오와 같았어.”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얗게 변해버린 긴 수염을 한번 쓰다듬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녀는 정서라든가 표정이 풍부했지. 목소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음색의 미묘함이 있었고 알 수 없는 묘한 울림이 여자였어. 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향긋한 미소를 보내주었지. 그녀는 마치 어두운 터널 저편에 비취는 작은 빛 한 줄기와도 같은 존재였네. 나는 그녀를 집에 초대했네. 우리는 함께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마셨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며 글렌 밀러와 엘라 피츠제랄드의 음악을 들었어. 진공관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우리를 낭만이 있던 1960대로 돌아가게 했지. 그날 밤 우리는 함께였네.”

 그는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는 눈물을 훔치고 수염을 다시 한번 쓰다듬고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날 사라졌다네. 다음 날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어 일어나 보니, 마치 주인에게 버려진 고양이처럼 나 혼자 방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지. 진공관 앰프 같던 그녀는 내 진공관 앰프와 함께 사라졌네. 나는 기억이 희석되어 사라지기 전에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썼네. 그리고 탄생한 작품이 바로 ‘진공관 그녀’라는 작품일세. 나는 이 작품을 그녀가 읽고 내게 다시 돌아와 주길 바랐네. 하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지.”

 그는 커피의 마지막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간이 흘러 한 중고 오디오 가게 주인이 나를 찾아왔네. 사라졌던 내 오디오와 함께. 그는 내 소설을 읽었다고 했네. 그리고 앰프에 새겨진 내 이름의 이니셜을 발견했다고 말했지. 이렇게 내 진공관 앰프는 제 자리를 찾았지만, 나는 그 오디오를 보고 더 큰 슬픔에 잠겼네. 앰프의 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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