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역사서사 비판
1. 들어가며
'나당전쟁' 혹은 '신라의 삼국 통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도는 대부분의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이 지도들은 일견 동일해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신라의 북쪽 경계와 관련하여 지도에 들어간 설명에 있어 두 가지 종류로 나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 지도들은 2022개정교육과정 한국사1 교과서들에서 가져왔습니다(모두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유형 모두 삼국 통일과 관련한 신라의 영역을 표시함에 있어 북쪽 경계선을 대동강-원산만으로 표시하였지만, 차이점은 이 시점에 대한 연도를 676년(보통 나당 전쟁의 종료 시점이고, 교과서에서는 삼국 통일 시점)으로 표시했느냐 아니냐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경우, 결국 신라의 북쪽 경계는 대동강-원산만 일대에 이르게 되지만 그것이 676년 나당 전쟁 승리와 함께 얻게 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 입장에서는 나당 전쟁 직후 성립된 신라 북쪽 경계로 읽힐 여지가 농후하긴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우리는 보통, 나당 전쟁 종료 시점 신라의 북쪽 경계선을 대동강-원산만 일대로 배워왔지만, 그것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과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서북쪽 경계선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이와 관련한 학계의 논의를 검토해보겠습니다.
※ 사실, 이 논의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고구려까지 통합한 삼국 통일로 볼 것이냐 백제 통합으로 볼 것이냐와 관련되어 있지만 이를 최대한 배제한 채 검토하고자 합니다)
2. 676년 시점, 신라의 북쪽 경계선 관련 사료에 대한 분석
① 상원 2년 2월에 인궤가 신라의 무리를 칠중성에서 깨뜨리고, 말갈병으로써 바다를 통해 (신라의)남경(南境)을 공략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고, 매소성에 주둔하여 신라와 세 번 싸워 모두 물리쳤다. 법민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사죄하며, 계속해서 공물을 바치자, 인문이 이에 돌아와 신라왕을 그만두었으므로, 조서를 내려 법민의 관작을 회복시켜주었다. 그러나 (신라는)백제 땅을 많이 취하고, 마침내 고려 남경에 이르렀다(然多取百濟地 遂扺高麗南境矣). 상·양·강·웅·전·무·한·삭·명의 9주를 두었다.
-『신당서』 신라전. (강조는 인용자)
②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경략하게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또한 사죄하자, 황제는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은 도중에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차지하여 마침내 고구려 남경까지 주와 군으로 삼았다(然多取百濟地, 遂扺髙句麗南境爲州郡).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강조는 인용자)
위 사료들에서 신라의 675년 시점에서 북쪽 경계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고구려 남경에 이르렀다.', '고구려 남경까지 주와 군으로 삼았다.'는 내용입니다. 위 사료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라가 675년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의 영역을 주군으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675년 신라가 백제 고지뿐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경역'까지 차지하고 이를 주군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김영하, 2014).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고 보는 견해 = 나당 전쟁 직후 신라 북쪽 경계선은 임진강 일대-원산만이다.
③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을 넘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들어가자(入高句麗南境) 고구려의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1년(642)(강조는 인용자)
이유⑴
①과 ② 사료의 '고구려 남경'을 남쪽 경계로 해석하는 이유는,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에서 남쪽 경계를 남경으로 기술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 ③ 사료에서 고구려에 억류된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김유신이 한강을 건너 들어간 '고구려 남경'이 고구려 남쪽 경계이기에 이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②의 『삼국사기』는 ①의 『신당서』를 전거로 서술한 것으로 보이는데 별도로 기술한 9주 설치를 하나로 엮어 기술함으로써 '주와 군'이 '영역'과 연결되도록 오해할 여지를 만들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게다가 9주 또한, 9주 중 북방의 위치한 한주, 삭주, 명주의 치소는 각각 지금의 경기도 하남, 강원도 춘천, 강원도 강릉이었고, 이들 3주의 지방군은 남천정(이천), 골내근정(여주), 벌력천정(홍천), 이화혜정(청송)이 설치되어 행정적, 군사적 중심지가 한강 이남에 있었던 사실에서 당시 신라의 서북 경계선은 임진강이었다고 봅니다.(김종복, 2019)
이유⑵
675년 즈음 신라가 당군과 교전한 나당 전쟁의 주전선인 천성, 매소성(교과서 지도의 설명처럼 경기도 연천 혹은 경기도 양주 등 위치 비정에 논란이 있음. 만약 양주라면 더 남쪽으로 내려와야 함), 칠중성, 석현성 등은 임진강 근처이기 때문입니다. 이 임진강 근처는 660년 백제 멸망 이전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과 유사합니다.
이유⑶
신라가 임진강 이북을 영역화한 것은, 기록상 그 이후이기 때문입니다. 효소왕 3년(694)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았고, 713년(성덕왕 12년)에 개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볼 때, 임진강 이북을 넘어 예성강 일대로 진출한 시기가 7세기말~8세기 초라는 점, 그리고 예성강을 넘어 대동강 이남 지역을 영역화한 것은 당이 신라를 발해 견제에 이용하고자 735년에 패강 이남 영유를 신라에 허락한 뒤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735년 이후 신라는 경덕왕 대와 헌덕왕 대에 이르러 예성강 북쪽과 대동강 남쪽 사이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고 782년에 발해에 대한 방위책으로 패강진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당과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당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당은 신라로 다시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기도 했기에(678년), 신라의 임진강 이북으로의 영역화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당의 위협이 사라지고 당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과 신라의 임진강 이북으로의 진출이 연계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전의 영역과 신라-당 전쟁 이후 영역을 비교해보면, 신라의 북쪽 경계가 크게 개척된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준성, 「신라-당 전쟁의 전개와 고구려 유민의 활동」, 『고구려통사7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유민사』, 동북아역사재단, 2024(강조는 인용자)
삼국통일전쟁론은 고구려가 475년에서 551년까지 한강 유역을 지배한 연고의식과, 당으로부터 735년에 패강 이남의 영유를 인정받은 뒤에 실현되는 신라의 영역화 의지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설명한다. 한편 백제통합전쟁론은 676년 당시에 신라는 임진강 이남의 백제 영역만을 차지했을 뿐이고, 698년에 건국한 발해가 고구려 영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함으로써 발생한 당과의 갈등을 신라에게 패강 이남을 하사한 배경으로 이해한다.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해석인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양자는 적어도 676년 이후 상당 기간 신라가 임진강 이북으로 진출하지 않은 사실에서는 일치했다. 여기에 바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 내용을 시정해야 할 이유가 있다.
- 김영하, 「신라의 ‘통일’영역 문제」, 『한국사학보』 , 2014(강조는 인용자)
2)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 경역에 이르렀다고 보는 견해 = 나당 전쟁 직후 신라 북쪽 경계선은 예성강 일대-원산만이다.
이유⑴
위 ① 『신당서』 사료에서 말갈병이 공략한 곳으로 신라의 남경이 나오는데 이를 신라의 남쪽 경계선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동일한 기록에 전하는 고구려의 남경 역시 고구려의 남쪽 경계선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경역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 남쪽 경계선으로 해석할 경우, 이전부터 675년까지 계속해서 신라의 북쪽과 고구려의 남쪽 경계선이 임진강이었는데, 『신당서』 의 찬자가 굳이 이때에 신라가 마침내, 즉 비로소 고구려의 남쪽 경계선인 임진강에 이르렀다고 표현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전덕재, 2019)
이유⑵
효소왕 3년(694)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았고, 713년(성덕왕 12년)에 개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가지고 신라가 이때에 임진강 이북을 영역화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논리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성을 쌓은 것과 이때에 비로소 영역으로 편입한 것과 직결시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735년 이후 당이 패강 이남 지역을 신라에게 사여하였다고 하면서 신라가 예성강을 넘어 개척을 시작한 것은 역설적으로 신라인들이 예성강 이남 지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사실,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까지만 이르렀다고 보는 견해는 신라가 백제만을 통합하였다는 백제통합전쟁론과 관련이 있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일부 영역까지 차지하며 삼국을 통일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를 반박하면서 위 ①, ②의 '남경'은 남쪽 경계가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영역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당 전쟁 직후 신라 서북쪽 경계선을 '대동강'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예성강 이북-대동강 이남으로의 신라의 영역화는 735년 이후라고 보고 있습니다.
문무왕은 백제토지와 고구려 남쪽 경역을 차지하기 위해 당과의 전쟁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백제토지 및 임진강 이북과 예성강 이남의 고구려 경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하는데 성공하였다.
- 전덕재,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려고 하였을까」, 『역사비평』 , 2019(강조는 인용자)
3. 교과서 서술에 대한 문제제기
삼국 통일 후 신라의 대동강 유역 진출을 학계 연구 성과를 반영해 좀 더 계기적인 차원에서 서술하고 지도에 표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장창은, 「현행 『중학교 역사 ②』 교과서 「남북국시대의 전개」 지도·그림자료 검토」, 『탐라문화』 2021.
이는 학습자들로 하여금 나당 전쟁이 종결된 직후부터 신라가 이 영역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잘못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지도와 서술은 8세기 발해와 당의 대립을 이용하여 신라가 당으로부터 영토 확장을 승인 받는 외교적 성과나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패강진을 설치하여 군진으로서 운영한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소거시킨다. 따라서 현재 교과서에 실린 통일 신라의 영역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며, 이와 함께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
- 김가람, 「신라와 발해의 영토 완성과 경계」, 연세대학교 석사논문, 2018.
더 생각하고 따질 여지가 있겠지만, 처음에 언급한 교과서 지도의 첫 번째 유형은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형의 경우, 결국 신라의 북쪽 경계는 대동강-원산만 일대에 이르게 되지만 그것이 676년 나당 전쟁 승리와 함께 얻게 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긴 했으나 본문 서술이든, 어디서든 위 의견들처럼 보완적 서술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이 글에서 주로 다루진 않았지만)고구려의 남경을 대동강 이남의 '남쪽 경역'으로 보고 신라가 675년에 이곳에 주군을 설치함으로써 사실상 반도를 통일한 것으로 해석하며 나당 전쟁 직후 신라의 영역을 대동강-원산만으로 서술하는 것의 연원은 어디서부터일까요? 이를 따져보고, 이러한 서술이 가지는 함의를 생각해보는 것이 사실 더 유의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다루기에는 역량이 부족하여 참고문헌 목록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참고자료]
한국역사연구회, 『시민의 한국사』, 돌배게, 2022
기경량 외, 『신라는 정말 삼국을 통일했을까』, 역사비평사, 2023.
김가람, 「신라와 발해의 영토 완성과 경계」, 연세대학교 석사논문, 2018.
김영하, 「신라의 ‘통일’영역 문제」, 『한국사학보』 , 2014
김종복,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발해사 서술 현황과 그 문제점」, 『선사와 고대』 , 2019.
이준성, 「신라-당 전쟁의 전개와 고구려 유민의 활동」, 『고구려통사7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유민사』, 동북아역사재단, 2024
장창은, 「현행 『중학교 역사 ②』 교과서 「남북국시대의 전개」 지도·그림자료 검토」, 『탐라문화』 2021.
전덕재,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려고 하였을까」, 『역사비평』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