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역사서사 비판
0. 들어가며
위와 같은 구도를 보여주는 지도는 꽤 익숙할 것입니다. 6세기 후반(589) 수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가 북방 유목 민족인 돌궐과 연합하고 백제-왜와 연결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어려움을 겪은 신라는 수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남북 세력과 동서 세력 간의 대결 구도인 십자외교가 전개되었다면서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지도입니다. 꽤나 익숙한 내용이지만, 올해 새로 개정되어 나온 2022개정교육과정 한국사1 교과서 중에는 오른쪽 사진의 1종을 제외하고는, 수가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고 당이 있었던 시기에 한정하여 서술하거나 혹은 서술 자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지도는 모든 종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수가 있었던 시기를 남북 세력과 동서 세력 간의 대결 구도(십자외교)로 설명하는 것은 오류에 가깝습니다.
1. 왜 오류인가?① : 돌궐-고구려의 관계
이 시기(수의 통일 이후) 돌궐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한 상태였고, 특히 동돌궐은 도람가한과 계민가한(수와 혼인 동맹을 맺고 수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 등 여러 가한 세력으로 분립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598년(수의 고구려에 대한 1차 침입이 있었던 시기)부터 서돌궐이 동돌궐의 도람가한과 함께 수와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공격하면서 수-동돌궐(계민가한) vs 서돌궐-동돌궐(도람가한)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동돌궐의 도람가한이 599년 피살되면서 이후 전쟁은 사실상 수-동돌궐 vs 서돌궐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만약, 십자외교의 구도라면 고구려가 이 시기 수를 견제하기 위해 우선 서돌궐과 접촉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① 동돌궐의 영역을 통과해 서돌궐과 비밀리에 교섭하기란 어렵다는 점
② 580년대 수가 동진하기 전까지 고구려 서방 변경을 위협하였던 주요 세력이 원래 돌궐이었다는 점(적대관계)
③ 서돌궐이 만약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고구려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상대라는 점
에서 "실제 598~607년 무렵의 국제관계를 보면 수-서돌궐 전쟁에서 고구려와 돌궐이 연대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이정빈, 2023)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돌궐은 603년 괴멸했습니다.
그 다음은 동돌궐(계민가한)인데, 우선 수와 서돌궐과의 전쟁 시기에는 수와 동맹 관계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와 같이 돌궐-고구려가 연합했다는 서술이 나오게 된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그 이후에 등장하는데, 바로 607년 8월 고구려가 동돌궐과 교섭하기 위해 간 계민가한의 막사에서 수 양제와 만난 사건입니다. 이를 두고 고구려와 동돌궐의 교섭이 이때 이외에도 여러 차례 추진되었을 가능성(고구려가 동돌궐에 지원 내지 협조 요청)을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① 관련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
② 동돌궐은 수와 종속적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
③ 위 607년 사건 당시 계민가한은 고구려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고 고구려의 사신이 방문해 있다는 사실을 수 양제에게 알렸으며(고구려 사신을 양제에게 데려가 대면토록 함)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이 실패했다는 점
에서 적어도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규정하여 연합하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은 의도대로 성사됐는지 여부가 불투명하다. 곧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규정해 실선으로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 장창은, 「현행 『중학교 역사 ②』 교과서 「남북국시대의 전개」 지도·그림자료 검토」, 『탐라문화』 2021.
유일하게 양국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7세기 초반의 기록 또한 양국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록의 내용은 고구려는 돌궐과 연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돌궐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정동준, 「『한국사』 교과서의 민족주의적 역사서술 분석-고대사 부분의 서술내용을 중심으로-」, 『선사와 고대』 2019.
2. 왜 오류인가?② : 수-백제와의 관계
수가 있었던 시기, 백제가 고구려와는 우호 관계, 그리고 수와는 적대 관계라고 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명확히 존재합니다.
왕은 수나라가 요동(遼東)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군의 길잡이[軍道]가 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가 없었기 때문에 장수에게 명하여 죄목을 들어 엄하게 나무라게[討罪] 토발하게 하였는데, 고원(高元, 영양왕)과 그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죄를 청하기에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니 정벌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수나라는] 우리 사신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자못 그 사실을 알아채고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략하였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5 위덕왕 45년(598)
봄 3월에 한솔(扞率) 연문진(燕文進)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또 좌평(佐平) 왕효린(王孝隣)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양제(煬帝)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움직임을 엿보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5 무왕 8년(607)
수나라 양제가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니, 왕이 국지모(國智牟)를 [수나라에] 들여보내 행군 기일[軍期] 일정을 요청하였다. 양제가 기뻐서 후하게 상을 더해주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보내 와서 왕과 함께 서로 모의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5 무왕 12년(611)
첫째, 598년 백제의 위덕왕은 수의 고구려 1차 침입이 추진되자 사신을 보내 군대의 길잡이를 자청(수의 군대가 회군한 이후라 수가 사양)하였고, 고구려는 이를 알고나서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607년 백제의 무왕은 수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요청했고, 611년 수의 2차 침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사신을 또 보내 자국 군대의 파병 시기를 문의했습니다. 수에서도 백제에 사신을 보내 파병 정보를 공유했습니다(물론 612년 수의 2차 침입 당시 백제는 군대를 국경에 배치하였으나 실제로 움직이진 않았습니다.)
수에서는 백제가 612년 고구려-수 전쟁 중에 양단책(兩端策)을 구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안으로 고구려와 통정하면서 수를 엿보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수의 평가는 백제와 수의 동맹이 공고하지 못하였음을 잘보여준다. 백제가 고구려와 통정하였다고 하듯 배후에서는 고구려의 외교공작이 펼쳐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제가 고구려의 동맹으로서 반수 연대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백제는 국제정세의 추이 속에서 자국의 현실적 이해관계를 고려하면서 유동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 이정빈, 「고구려·수의 갈등 심화와 주변국의 동향」, 『고구려통사6 7세기 국제정세와 고구려-수·당 전쟁』, 동북아역사재단, 2023
또한 백제가 돌궐과 연합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3. 결론을 대신하며 : 현재 학계의 의견은?
남북 세력과 동서 세력의 대립으로 7세기의 국제정세를 설명하는 방식은 현재도 학계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은 남북 세력에서 돌궐을 제외하고, 두 세력이 대립한 시기를 7세기 중반(구체적으로는 640년대 이후)으로 한정하는 견해가 다수이다. 따라서 교과서 서술 또한 7세기 중반의 국제정세는 고구려, 백제, 왜의 남북 세력과 신라, 당의 동서 세력이 대립하는 형세였다고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 정동준, 「『한국사』 교과서의 민족주의적 역사서술 분석-고대사 부분의 서술내용을 중심으로-」, 『선사와 고대』 2019.
당시 정세를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화된 도식'은 언제나 위험하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고자료]
한국역사연구회, 『시민의 한국사』, 돌배게, 2022
이정빈, 「고구려·수의 갈등 심화와 주변국의 동향」, 『고구려통사6 7세기 국제정세와 고구려-수·당 전쟁』, 동북아역사재단, 2023
장창은, 「현행 『중학교 역사 ②』 교과서 「남북국시대의 전개」 지도·그림자료 검토」, 『탐라문화』 2021.
정동준, 「『한국사』 교과서의 민족주의적 역사서술 분석-고대사 부분의 서술내용을 중심으로-」, 『선사와 고대』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