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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 피어오라

by 리타

어릴 때 강낭콩 키우는 실습에서 갓 싹이 틘 모습을 보고 쉼표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강낭콩처럼 문장의 바닥에 놓여있는 쉼표는, 마침표와는 달리 다음에 피어날 문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유월. 시월과 더불어 발음에 받침을 잃어버린 달. 어느새 봄의 새싹이 푸르러지는 여름이 됐다. 에세이를 안 올린 지 두 달이 넘었다. 사실 아예 글을 안 쓴 건 아니고, 썼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발행 안 하던 걸 3번 정도 반복하다 보니 벌써 두 달이 흘렀다. 하나는 제대로 검증이 안 된 민감한 주제를 건드린 것 같아서, 하나는 관련해서 좀 더 공부한 다음 내용을 다듬으면 더 좋은 글이 될 것 같아서, 하나는 시기가 시기다 보니 잘못하면 정치 관련된 내용으로 엮일 것 같아서. 그래도 최근에 있었던 대선과 이와 관련된 후보/정당들의 언행 덕분에 글로 적지는 못하더라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옳음과 옳음의 기준이란 무엇인지, 민주주의와 대중이란 무엇인지, 인지와 판단과 믿음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바람직한지, 과거를 어떻게 대하고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등. 그러다 대부분 허무한 상태로 생각이 끝난다. 정치인이 될 생각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소신껏 투표하는 것과 나 하나의 인생을 잘 꾸려나가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생은 잘 꾸려나가고 있다. 글을 올리진 않았어도 다른 창작활동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세이가 뜸했다는 핑계도 살짝 대본다.) 우선 최근에 이사를 하면서 인테리어를 열심히 했다. 새로운 공간 도화지가 생긴 김에 단순히 생활 공간을 꾸미는 것을 넘어서, 내 가치관과 철학적 의미를 담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공간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맞춰서 바닥 타일도 깔고, 그동안 조금씩 스크랩만 해뒀던 가구/소품들도 이번에 대거 활용했다. 완성하는 데 생각보다 비용도 들고 시간도 한 달 가까이 걸렸지만 그래도 다 하고 나니 이제 바라만 봐도 뿌듯하다.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유튜브 자취남 채널에 출연하는 건데, '마치 한 편의 철학 에세이를 듣는 듯한 집 소개를 들을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신청자가 많이 밀려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올해 안에 가능할까. 물론 말은 이렇게 썼어도 꼭 올해일 필요는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둔 상태니, 그냥 별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다.

새 집에 만든 나만의 작은 서재


하반기에 진행할 새로운 독서모임도 기획하고 있다. 칵테일과 함께 하는 독서모임인데, 여기서 칵테일이 일반 칵테일이 아니라, 그날 진행할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내가 만든 창작 칵테일과 함께 하는 독서모임을 기획 중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새 집에 꾸려둔 홈바에서) 창작 칵테일 공부와 개발을 열심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혼술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깼다. 일단 목표는 소박하게, 참여했던 분들에게 만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간 낭비였다는 생각은 안 들게 하기. 처음 도전해 보는 일이라 기대도 두려움도 있지만, 혹여나 실패한다 해도 그 경험 또한 나중에 칵테일 바를 차릴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올해 초부터 구상하던 소설의 구체화도 꽤 진척이 있었다. 사건과 플롯, 전개 방식, 주요 메시지 등은 거의 확정했다. 작년에 썼던 소설은 원고지 70매 정도의 단편소설이었는데, 이번 소설은 아마 10개 정도 챕터로 이루어진 중단편~중편 정도 분량이 나올 것 같다. 1~2개 챕터만 더 구체화되면 이벤트와 중요 대화는 거의 다 정리가 된다. 다음으로는 동글동글 박혀있는 장면들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연결해서 문장화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지난 소설을 쓸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이 작업이 가장 고비일 것 같다. 이 부분은 지금처럼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마다 정리하는 방식으로는 어려울 것 같고, 작년에 했던 것처럼 산속에 들어가 혼자 글 쓰는 여행을 가서 며칠 몰두하면서 분투하고 와야 될 것 같다. 이 소설은 어차피 목표가 내년까지기도 했고, 생각과 가치관을 작년에 쓴 소설보다 훨씬 많이 녹인 소설이라, 좀 더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바라보면서 완성도를 높여도 될 것 같다.


분명 올해 초에 2025년은 쉬어가는 해로 보내자고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일이 계속 벌여져 있다. 하고 싶고, 할 수 있고, 해도 되면, 해야 한다. 라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다.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하고 싶다'보다 올라올 때, 그때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일단은, 나인 그대로 피어나는* 것에 집중하자.


* 달의 하루, <너로피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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