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퇴근 후 만난 친구와 다양한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마지막 주제가 '사람들은 각자의 감상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였다. 그러다가 영화 <위플래쉬> 이야기가 나왔다. 드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지인들이 이 영화를 추천해 줘서 본 적 있었다. 난 이 영화에서 '열정'의 충격을 느꼈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피가 나고, 교통사고를 당한 상태에서까지 드럼을 미친 듯이 치는 모습을 보며, 영화 내내 '나에게는 저런 열정이 있을까'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내게 열정이라는 단어를 일깨워 주는 사람들은 모두 드러머다. '언젠가 악기를 한다면 드럼을 해야지'라고 생각만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 생각을 드럼 학원 등록이라는 행동으로 변화시켜 준 두 분이 있다. <여기, 저 살아있어요>를 쓰신 김소민님과, 밴드 QWER의 드러머 쵸단님이다. 특히 죽음보다 더한 통증이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고, 피부에 닿는 모든 것, 심지어 바람까지도 극심한 통증을 야기하는 CRPS(복합부위통증증후군) 증상을 겪고 계신 김소민님이 드럼에 도전하신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김소민님의 열정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학원 등록을 했던 기억이 난다.
쵸단님이 드럼 학원 등록에 기여하신 건 열정보다는, 드럼 치는 모습의 멋짐이 한몫했다. 그러다 최근에 충격적인 소식과 영상을 봤다. 충격적인 소식은, 쵸단님이 연습을 과도하게 해서 무릎 연골연화증과 추벽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영상은, 그 상태로 신곡 <눈물참기>의 쇼케이스를 했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누가 봐도 힘든 상태에서 중간중간 이를 악물면서 어떻게든 고통을 참고 견디려는 모습과 마지막에 끝났을 때 긴장이 풀렸는지 사시나무 떨듯이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데 서툰 나조차도 마음 한켠에 찡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있는 상태에서 드럼 연습을 간 적이 있었다. 그러다 드럼을 치면 진동이 온몸을 울린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10분도 못 친 채 나왔던 기억이 있다. 사지에서 가장 먼 두통도 이럴진대, 드럼 행위에 가장 직결되는 무릎,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진동을 만드는 베이스드럼을 쳐야 하는 오른쪽 무릎의 고통을 도대체 어떻게 참으면서 할 수 있었던 걸까. 그런 열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내가 열정이 없는 사람이냐 하면 그렇진 않다. 오히려 많은 편에 속하긴 할 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고, 그중엔 실제로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있는 것들도 많다. 그리고 그 모든 프로젝트에는 당연히 다양한 종류의 비용이 들어가거나, 이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는 것들이 생긴다. 내가 포기하는 것들은 보통 수면이나 식사 같은 것들인데, 이들이 내겐 가장 쉬운 포기이기 때문이다. 현대 시간표에 맞지 않는 야행성과 불면증을 가지고 있어서 늦게 자기 - 일찍 일어나기 - 일찍 잠들기 순으로 쉬운 내게, 새벽 늦게까지 프로젝트를 하다가 지쳐서 잠들고 알람과 출근의 책임에 겨우겨우 일어나는 게 가장 일반적인 루틴이다. 물론 수면 부족에 악화되는 건강은 다른 문제지만. 식사도 원래 식욕이 없어서 끼니를 배고파서 먹기보단 의무감에 먹는 사람이라, 작업하다가 끼니를 거르는 정도는 아무런 고통 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딱히 열정을 위해 '고통'으로 볼 수 있을만한 것들을 지불하진 않는 것 같다. 운동할 때도 힘이 부쳐서 도저히 내 몸이 마음대로 수행하지 못해 세트를 진행하지 못하는 운동(랫풀다운 같은)은 열심히 하지만, 근육이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세트를 진행할 수 없는 운동은(사이드 래터럴 라이즈 같은) 하지 않을 정도로,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달리기의 생각 질문은 '난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쏟을 열정이 있는가, 혹은 그만큼 열정을 쏟고 싶은 대상이 있는가'일 예정이었다. 양재천 근처로 이사 오면서 매주 1~2회 정도 5km 달리기를 하고 있다. 다만 그냥 달리면 힘들기 때문에 신경을 분산하고자, 생각 주제를 하나 정하고 관련된 고찰을 하면서 달리곤 한다. 앞 문장이 '예정이었다'인 이유는 달리다 보니 오늘은 왠지 기록을 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달리기 자체에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완주에 목표를 두며 부담 없이 달리다가, 31분 23초라는 애매한 기록을 보고 30분, 즉 평균 6분 페이스 내에 들어오는 걸 목표로 했다. 오늘따라 왠지 몸이 가벼운 것 같기도 하고, 첫 페이스도 나쁘지 않아 이번에 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집중해서 열심히 달렸다. 특히 마지막 1km는 있는 숨 없는 숨 모두 끌어모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드디어 운동 앱에서 5km 완주를 알려주는 음성이 나왔다.
'총 5km. 30분 1초'
순간 나도 모르게 '으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나도 내 행동에 당황하면서 민망함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아쉽고 화가 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주 작은 안도감도 같이 들었다. 다음에도 도전할 목표가 아직 남아있구나. 사람 마음이란 건 참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