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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Nov 18. 2022

틀을 깨기

스타트업과 창업 붐으로 인해 다양한 소셜 커뮤니티가 생기고, 추천 알고리즘의 발달로 에코 챔버(echo chamber,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이면서 그들의 신념이 증폭되는 현상)가 일어나면서 세대 차이도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영향으로 틀딱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원래 어원은 ‘틀니 딱딱’의 약자로 노인 비하의 의미가 담긴 안 좋은 단어이다. 그래서 이 단어를 ‘ 박혀 나오지 않는 사람’으로 다시 정의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내 직업은 새로운 변화와 트렌드를 잘 따라가야 하는 개발자이지만, 내 취향은 여전히 예전에 머물러있다. 우선 사진기부터 DSLR을 좋아한다. 미러리스 카메라가 나와 휴대성뿐만 아니라 성능적인 다양한 면에서도 DSLR을 따라잡기도 했고, 요즘은 스마트폰 카메라도 잘 나와서 굳이 따로 사진기를 안 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DSLR을 고수하는 이유는 손맛이다. DSLR이 주는 묵직한 무게감과 그립감, 이를 느끼며 반셔터를 지나 셔터를 누르는 찰칵의 진동 다른 카메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감성이다.


보드게임도 그렇다. 요즘 인터넷으로도 많은 보드게임이 제작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드게임인 <테라포밍마스>도 온라인으로 나와서, 친구들하고 해봤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별로였다. 친구들과 같이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벽 보고 혼자 노는 느낌이 들었다. 이 또한 손맛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덱에서 카드를 뽑을 때 실수로 두 장을 가져가지 않게 조심히 뽑고 무엇이 나올지 두근거리면서 뒤집는 그 느낌,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뽑아 내려놓고, 또 친구들이 내려놓는 카드를 유심히 분석하는 그 느낌은 디지털로 재현된 세계에선 느낄 수 없었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전자책 전용 리더기도 생기고 ‘밀리의 서재’ 같은 구독 서비스도 생기면서 e북 서비스들이 많이 퍼졌다. 나도 올해에 처음 책 읽기를 시작해 보려 할 땐 ‘밀리의 서재’로 시도해 보려 했다. 하지만 확실히 종이책이 주는 손맛을 잊을 수 없었다. 의자나 벽에 등을 기대고 꼰 다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책의 무게를 느끼는 자세는 전자책으로 느끼기 힘들다. 특히, 오른쪽 엄지손가락의 긴장을 살짝 풀면서 한 장이 넘어갈지 한꺼번에 두세 장이 넘어가버릴지 모르는 순간의 긴장감에 두근거리면서 책장을 넘기는 손맛은 절대로 대체될 수 없다. 물리적 소장의 목적도 있지만, 이런 손맛의 이유로도 요즘 읽는 책은 모두 종이책으로 사서 읽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점들 때문에 내가 틀에 갇혀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인지하고, 분석해 보고, 실제로 사용도 해봤다. 하지만 그곳에서 느끼지 못하는 손맛 때문에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미러리스를 쓰거나, 온라인으로 보드게임을 하거나, e북을 읽는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이 중에서 종이책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틀 중 하나가 깨지는 경험을 했기에, 이에 대해 써보려 한다.


종이책의 단점은 걸어가거나 대중교통에 서있을 때 읽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엔 보통 그동안 만들었던 생각 조각들을 검수하거나  새로운 생각 뭉치를 만들어내곤 한다. 하지만 요즘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이 시간에도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아침에 걸어가면서 종이책을 들고 읽고 있는 사람을 봤다. 아! 충격이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걸어가면서는 종이책을 읽을 수 없다고 단정해버린 내 틀이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폰을 보면서도 주위를 살피며 걷는데 익숙해졌는데, 그 대상이 종이책이 못 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열심히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많은 틀에 갇혀있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틀을 깨기 위해 일정이 끝나고 오는 길에 실천을 해봤다. 아직 길거리에서 읽기에는 항마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지하철부터 시작해 봤다. 당연히 바쁜 서울의 저녁의 2호선에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다만 다행히 두 팔로 내 몸을 고정하지 않아도 되는 구석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구석에 기대어 물리적 균형을 맞추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게 무관심했고, 내 책갈피는 38페이지를 전진할 수 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고찰하면서 나의 가치관을 만들어나기로 했을 때 꼭 지키자고 다짐한 두 가지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기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하지만 그중 두 번째 항목, 다시 말하면 틀에 갇히지 않는 것은 아무리 계속 생각하려 해 봐도 어려운 것 같다. 역시 더 많은 글,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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