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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Nov 17. 2022

이과적 사고

이번 글은 올해 초에 썼던 시로 시작해 보자.



면역체계


면역체계는

있으면 안 되는 존재들을

힘들고 아프게 해서

사라지게 한다


어쩌면 내가

있으면 안 되는 존재여서

힘들고 아픈 걸까

사라져야 할까



이 시는 소설을 보다가 주인공에 감정이입돼서 영감을 받아서 쓴 시다.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에게,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버림받아서 '다들 왜 나한테만 이래'하면서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이었다. 마침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의학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여기서 면역체계 관련 이야기가 나왔었다. 갑자기 이 두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영감이 떠올라 이 시를 쓰게 되었다.


난 이렇게 이과적인 시선으로 인문적인 내용을 풀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전에는 컴퓨터 견적을 맞추다가 영감이 떠올라서 쓴 글도 있었다. 컴퓨터는 견적을 짤 때, 용도를 먼저 생각한 다음에 그 용도에서 너무 과하지 않도록 체급을 조절한다. 가령 가벼운 문서작업만 할 사람들이 RTX4080 같은 걸 사용하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왜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체급을 올리는 것에만 집중을 하는가에 대해 성찰하는 글을 썼었다. 학교 대나무숲에 투고를 해서 많은 공감을 받았었는데, 대숲에서 못 보게 될지 모르고 따로 저장을 안 해놔서 지금은 확인할 수 없게 되어 아쉽다.


흔히 이과적 사고라 하면 정이 없고, 논리적으로 냉정하게만 생각해서 실제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는 결이 다를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 이과를 나누면서 선을 그어놨기 때문에 더 그런 이미지가 굳어진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과적인 사고도 인문학적인 내용을 많이 품고 있다. 과학이라는 게 세상을 규명하는 학문인데, 사람도 세상의 일부이지 않는가. 고대 그리스만 봐도 철학자가 수학과학도 모두 했다.


내가 처음 철학적 사고를 하게 된 것에도 물리학의 영향이 크다. 가장 처음 생각을 하게 해줬던 내용은 상대성이론이었다. 상대성이론은 간단하게만 말하면 상대속도에 따라 관측자가 볼 때 길이,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 관측자 A, B가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A라는 관측자는 어떤 물체가 1m라 주장하고, B라는 관측자는 어떤 물체가 2m라고 주장해도 둘 다 진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서로 상반된 주장이 대립된다 해도 꼭 하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둘 다 옳은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두 관측자의 상태(속도)가 다르듯이, 우리들도 서로 다른 상태(살아온 삶)를 가진 상황에서 관측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틀린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진실이 공존할 수 있다.


색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참 재밌다. 우리에게 보이는 색이 진짜 그 색이어서일까? 하늘을 생각해 봐도 원래 공기는 투명색이다. 다만 빛의 산란 때문에 파란색으로 보일 뿐이다. UV 라이트나 적외선카메라로만 봐야 보이는 것들은 그들의 색이 아닌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물체의 색은 가시광선 아래에서 보이는 색이다. 즉, 그 물체가 가진 절대적인 특성이 아니라 가시광선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특별하게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게다가 이렇게 가정을 해도 사람들마다 똑같지 않다. 색맹인 분들은 우리가 다르다고 보는 걸 같다고 보고, 4색각을 가진 분들은 우리가 같다고 보는 걸 다르게 본다. 즉, 우리에게 보이는 색은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단순히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판단이 들었을 때, 이게 절대적으로 정말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나에게만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한 번 더 고민을 해보게 되었다.


허준이 교수님도 수학이 인문학적 성격이 강하다고 하시면서 수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사람의 마음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신다. 이과적으로 무언가를 밝혀내고 증명하는 것은 엄밀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게 밝혀진 현상을 살펴보고, 우리 삶에 여러 방향에서 대입해 보면 재밌는 인문학적 관점들이 도출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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