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타 Nov 21. 2022

별거 아닌 일

내가 개발자여서 효율을 중시하는 것인지 효율을 중시했기 때문에 개발자가 적성에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효율적인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감정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는 편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우선 이 감정을 유지하는 게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한다.  부정적인 감정이어도 잘 활용하면 투지, 결심 등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말 필요 없는 상황이 있는데, 어차피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부정적인 감정은 내 마음만 갉아먹을 뿐 상황을 진전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면 무덤덤해져보려 한다. 어차피 어쩔 수 없잖아. 그럼 별거 아니야. 차라리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곳에 투자를 하자.


너무 이상적인 생각 같지만 몇 년째 계속 시도하다 보니 이젠 생각보다 잘 된다.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열심히 해서 적어도 작은 일로까지는 만들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 어차피 안 되는 일이니 무덤덤해지면서 별거 아닌 일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 죽을 만큼 힘들다 같은 부정적으로 큰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 하지만 그 부작용인지, 뛸 듯이 기쁘다 같은 긍정적으로 큰 감정도 못 느낀 지 오래된 것 같다. 전역을 했을 때도, 게임에서 현금으로 50만 원 정도의 가치인 아이템을 획득했을 때도, 취업에 성공했을 때도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감정의 분산이 줄어들었나 보다. 뭐,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덕분에 소소한 행복도 비교적 크게 느껴진다. 오늘도 집에서 5분 거리에 큰 도서관을 발견해서, 집에 가는 길에 들를 생각에 퇴근길이 즐거워지는 소소한 행복이 있었다.


개발 공부 겸 토이 프로젝트를 할 땐 내가 그때 필요한 것을 만드는 편이다. 그래야 기획도 재밌고 코딩도 계속해나갈 힘이 난다. 작년 이맘때쯤에 그렇게 만든 토이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이것도 당연히 내가 필요해서 만들었는데, 만들고 나니 나와 같은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 해서 관련 커뮤니티에 공유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셨다. 최근엔 WAU가 3.5만 명까지 올랐다. 그래서 어느 프로젝트보다도 더 열심히 개선하고, 더 안정적인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 서버도 더 비싼 곳으로 옮겼다.


근데 최근에 이 사이트가 다운되었다. 내가 사용하는 도메인 사이트에서 결제 관련해서 카드사와 분쟁이 생겨서 내 도메인이 그냥 정지되어버렸다. 각자의 처리 프로세스가 있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그 분쟁을 바로 끝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이미 그 도메인으로 공유되었기 때문에 도메인을 바꿀 수도 없고, 도메인 기관을 이전하려고 해도 분쟁이 끝나야만 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20일이나 다운된 상태가 유지되다가 오늘이 되어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다운되어서 이전 사용자들이 다시 돌아와 줄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분하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무덤덤해지고 별거 아닌 일이 되었다. 이 정도 큰일이면 안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도 잘 된 게 신기했다. 일하고 사람들 만나다 보면 아직 복구가 안 되었는데도 며칠 동안 까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느낀 게 하나 있는데, 별거 아닌 일이 되는 건 맞지만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거였다. 모래알처럼 작고 사소해졌지만 그 모래알이 신발에 들어간 느낌이다. 까먹고 있다가도 한번 느껴지면 아프진 않지만 계속 거슬린다. 모래알로 만드는 것은 이제 숙달이 되었는데, 그 모래알을 빼는 방법은 아직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은 평소보다 운동을 더 많이 해봤다. 운동을 하다 보면 그만하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다른 생각들을 모두 밀어낸다. 근력운동은 그래도 잠깐씩 쉴 때마다 잡생각이 드는데, 유산소는 쉼 없이 하다 보면 정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그렇게 40분 정도 경사를 타고 내려와 바닥을 밟으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그러면 내 뇌도 싹 비워져 가벼워진 느낌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성공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글쟁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그렇게 운동으로 머리를 싹 비우고 책상에 앉아 글쓰기 시작하니 다시 머리가 꽉 차버렸다. 난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럼 별거 아닌 일이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사랑으로 잊으라는 말이 있다. 그래, 토이 프로젝트는 토이 프로젝트로 잊어보자. 마침 요즘 필요한 게 생각나서 기획한 프로젝트가 있다. 타겟층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좁을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여러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봐야겠다. 쓰다 보니 이렇게 필요성을 느끼면 작게라도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개발자가 가진 큰 축복인 것 같다. 내가 개발자임에 소소하게 행복해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작가의 이전글 잘 팔리는 책, 잘 안 읽는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