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에 대해 쓰다가 생각난 에피소드. 저번달에 새로 시작한 독서모임의 첫 모임이 있었는데, 끝나고 가는 길에 한 분이 내게 선한 사람 같다고 해주셨다. 물론 태어나서 좋은 사람 같다는 칭찬을 한 번도 안 들어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친절, 배려 같은 단어는 들어봤어도 '선하다'라는 표현은 내게 쓰기엔 너무 숭고한 느낌이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죄책감 같은 기분이 제일 먼저 들었다. 마치 신성력을 맞은 악마가 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선하다는 표현은 이타적이라는 표현과 같이 사용된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더 위하는 마음. 그리고 그러한 진심에서 우러난 선행. 하지만 난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전 글에도 썼듯이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나 자신을 돌아봤을 때 후회 없이 뿌듯하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시간이 지나도 내 작품들이 빛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두 이유 모두 정확히 나를 위한 것이다. 이타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한 이기심에서 비롯되어 이성적인 판단하에 좋은 사람이 되려는 작위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렇다. 내가 펼치는 선은 명백히 위선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고 나니 위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위선이란 단어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실제로 위선이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많다. 상대방을 기망했다는 것과 더불어 위선이 가져다주는 배신감은 그냥 나쁘게 구는 것보다 훨씬 큰 절망감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위선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진심에서 우러나온 선만이 진정한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유현준 교수님이 <돈과 꿈에 대하여>라는 영상에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항상 저한테 요즘에 인터뷰 들어오면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은 '교수님은 어떻게 건축가가 되셨나요?' 그러면은 '그냥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라고 답을 합니다. (중략) 인터뷰할 때 그렇게 답을 하는 이유는 '저는 열 살 때부터 건축가를 꿈꿔 왔고요, 엄청나게 재능 있는 거 같았고, 그래서 건축가를 꿈꿔왔고 됐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순간 '열 살 때 건축가를 꿈꾸지 않은 사람들은 건축을 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심어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거든요.
사람 마음이란 건 마음대로 되기 어렵다. 더군다나 나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면서 돕고자 하는 마음은 더욱 자연스럽게 들기 힘든 마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은 선은 행하면 안 된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나온 위선이라는 표현. 혹시 이 표현이 선을 행하려는 사람들을 멈칫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들의 위선은 과연 정말 나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좋은 위선과 나쁜 위선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뜬금없지만 머리카락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하고 싶은 머리가 있어서 미용실에 가면 머리카락 가위질을 하는 것을 나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다듬은 머리는 누가 손으로 헝클어 버리려고만 해도 마치 내 몸이 공격당하는 것처럼 반응하게 된다. 같은 머리카락이고 짧은 시간 간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내가 그 머리카락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는지가 달랐기 때문이다. 즉, 내가 지키려는 마음만 있다면 마치 그 대상은 마치 내 신체의 일부처럼 여겨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위선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왔든지 생각에서 나왔든지 어떤 의도였든지 상관없이, 그 선을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면을 쓴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가면은 언젠가는 벗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면이 정말로 끝까지 지켜진다면 그것은 가면이 아니라 그 사람의 피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선을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면, 위선도 충분히 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