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 인(人)에는 다리만 있어요?"
한자를 처음 배웠을 때 이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선생님께서 이 글자는 사람 한 명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나타낸 이유는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사회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 한자처럼 서로에게 잘 기대며 살아가고 있을까?
독서모임에서 각자 생각하는 어른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자신이 한 선택에 오로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고, 그렇기에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에 큰 의미를 줬던 것 같다. 반대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대거나 의지하는 것에 대해 애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영향을 주지 않고 나 혼자 스스로 책임지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이것이 나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그래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에 읽었던 <그들이 그렇게 연애하는 까닭>에서 이 생각을 정확히 반박하는 말이 있었다. 이 책에서는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만들어진 안전 기지가, 오히려 우리를 더 독립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다. 이 말을 듣자 뜬금없게도 코딩을 처음 배울 때 기억이 생각났다.
코딩에서는 모듈, 라이브러리, 패키지, 프레임워크 같은 개념이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여러 곳에서 두루 사용될 만한 기능들을 잘 포장해서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가져다 사용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이런 개념들이 성장하여 오픈소스와 같은 좋은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최근에는 SaaS(Software as a Service)처럼 해당 분야를 잘 모르거나 자원을 투자하기 어려운 사람도 쉽게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상품도 나왔다. 이처럼 서로 활발히 공유하고 같이 발전해나가는 분위기도 이 분야가 지금처럼 발전한 것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코딩을 처음 배울 때 오히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코드를 가져다 사용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그래야 내 실력이 오른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의 코드를 믿지 못해서였다. 첫 번째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서 만약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면 가능한 한 직접 구현해 보라고 할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째는 지금 생각해 보면 오만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공부보다는 프로젝트 기획과 완성을 목적으로 코딩을 하고, 코딩을 직업으로 삼고 나서 성향이 바뀌었다. 오히려 요즘은 적극적으로 다양한 라이브러리나 프레임워크를 사용하고 있다. 오만한 생각에서 벗어나 오히려 이런 것들을 사용하는 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챙겨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고 나니 내가 집중할 수 있는 부분에 더 에너지를 쏟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러한 점에서 위의 책에서 한 말이 공감이 되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코드에 의존함으로써 생긴 안정성 덕분에 내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낭비하지 않게 되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에 가치를 발휘하여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 더 잘 녹아드는 프로젝트들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댄다'라는 표현을 봤을 때 힘들 때 의지하는 것처럼 감정적인 부분만 생각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코딩에서의 경험을 생각하고 나니 기댄다는 표현을 더 넓은 의미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나는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많이 기대고 있었던 것 같다. 패션을 조언해 주는 친구에겐 옷을 더 잘 입고 싶은 마음을 기대고 있고, 독서모임에는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을 기대고 있고, 이 플랫폼에는 내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을 기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대는 것이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가치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코딩에서 라이브러리 등을 가져다 쓰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문화가 있었다면 SaaS와 같은 산업이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회사 동아리에서 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룰 마스터(해당 보드게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룰을 설명해 주는 역할)를 주로 담당하는데, 룰을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난 오히려 내게 그런 기회를 주고, 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같이 플레이해 주셔서 고마웠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가르쳐 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에게 질문을 받는 것도 좋아했고, 스터디나 세미나도 종종 진행했다. 가장 자신 있는 알고리즘이나 칵테일 분야에서는 글도 가끔 썼다. 고등학교 때 봤던 슬로건 중에 '배워서 남 주자'라는 것이 있었는데 너무 맘에 들어서 열심히 써먹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내게 질문하거나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덕분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들의 고맙다는 말에 오히려 내게 가치 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감사하기 위해, 그리고 서로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더 마음 편히 서로에게 기대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이것이 사람 인(人) 글자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