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말에 친구들과 노을 보러 을왕리에 드라이브를 갔다. 마침 날씨도 맑았다. 해변에 도착해서 새우깡에 달려드는 갈매기들을 보며 슬슬 걷고 있었는데, 해가 점점 내려가면서 윤슬의 길이 드리우길래 사진도 찍었다. 이렇게 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고 한다는 것을 얼마 전에 처음 알았다. 들으면서 글자부터 정말 아름다운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보니 더 아름다웠다.
해가 지는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겨울 바닷바람은 너무 추웠기 때문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일몰이 시작하기 10분 전쯤에 나왔다. 나오니 아까는 없었던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위에만 낀 게 아니라 마치 운무처럼 수평선을 덮으며 구름이 생겼다. 결국 해가 바다를 넘어가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런 자연을 보다 보면 무기력함을 느낀다. 처음에는 압도적인 크기에서 무기력함을 받는다. 지구는 평면이 아닌 구인데 그게 평면과 직선으로 보일 만큼의 크기. 그리고 지구보다도 훨씬 큰 태양이 손톱만 한 크기로 보일 거리. 이런 광활한 자연의 앞에 서면 작은 먼지가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오늘 노을 직전에 갑자기 구름이 끼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에서 또 무기력함이 온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자연이 주는 무기력함이 좋다. 표현은 무기력이라 표현했지만 초라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오히려 괜찮다고 위로를 해주는 느낌이다. 이 커다랗게 굴러가는 자연 아래에서 하나의 작은 존재일 뿐이기 때문에 너무 모든 일에 최고의 결과를 내는 것에 목매지 않아도 된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진 것들이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은 원래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이 흘러가듯, 결국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이 노을을 보며 어차피 세상은 내가 조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의도하려는 것보단 그 흐름을 해석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정말 바다에 넘어가는 노을만 생각하고 있었다면 구름이 낀 하늘을 보며 실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는 단어가 하나 생각났다. 운평선. 땅이 만드는 지평선, 바다가 만드는 수평선이 아니라 구름이 만든 깔끔한 운평선을 넘어가는 해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귀한 경험이며 윤슬의 길 다음 작품에 걸맞게 충분히 아름다웠다.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말 중에 가장 가슴에 새겨진 말이 '진인사대천명'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결국 하늘이 좌지우지한다는 무기력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무기력이 내가 자연에게 받은 무기력과 같다면 다르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생기는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든 결과와 내 의도가 달라질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하지만 내가 그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하늘의 뜻을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뜻이 의도한 결과와 다르더라도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미련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마치 운평선의 노을처럼 그 결과를 자유롭게 해석해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