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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Apr 06. 2023

왜 돈 주고 사는 건데

일본에 갔다 온 지 2주 정도 되어간다. 사 온 디저트는 거의 다 나눠 먹었고, 컵들도 이미 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안 건드린 것이 있다. 바로 리큐르다. 정확히는 하나도 안 건드린 건 아니고, 세 병을 사 왔는데 그중 하나는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칵테일 만드는데 사용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개는 아직 사 온 그대로 장에 진열되어 있다. 몇 시간 동안 걸어 다니면서 10개가 넘는 리큐르샵을 돌아보며 구매할 정도로 일본에서 사 온 것 중 가장 힘들게 얻은 것인데 뚜껑도 열어보지 않은 건 이제 보니 신기하다. 물론 건강이 우려되어 혼술은 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었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힘들게 얻었으면 다짐을 깰까 고민이 들 만도 한데, 혹은 마시진 않아도 뚜껑이라도 열어서 향이라도 맡으며 대리만족을 할 만도 한데, 신기하게도 그런 마음이 막 들진 않는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다.


수집했던 플레잉 카드들

생각해 보면 취미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스팀 플랫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지만, 구매한 게임은 150개가 넘어가는데 정작 해본 건 20개도 안 되는 것 같다. 좋아하는 가수 앨범 CD는 구매하지만 CD를 재생해 본 적은 없다. 그중 가장 심한 건 플레잉 카드 수집이지 않을까. 특별한 플레잉 카드를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데 말 그대로 수집만 한다. 손의 기름이 묻을까 봐, 카드게임을 하거나 꺼내서 놀진 않는다. 처음 한번 꺼내서 감상하고, 그거에 만족한 채 취미 공간에 모셔둔다.


책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건 내가 사는 속도에 비해 요즘 잘 안 읽고 있어서 계속 쌓이고 있는 것도 있다. 그래서 아직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이 많은데 괜히 또 사고 싶어질까 봐, 즐겨보던 북튜브도 최근에는 일부러 안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출근길에 보게 되었고, 결국 그대로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책을 4권 사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신기한 게, 아직 읽어보지도 않았는데도 책을 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에 뭔가가 채워지면서 평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실제로 사용도 안 할 거면 왜 돈 주고 사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구매한 순간부터 내 목적을 달성했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흔쾌히 소비를 할 때는 사용을 목적으로 돈을 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돈이지만 나도 한 손 보태면서 그 분야가 발전하고 그 창작자가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이로 인해 계속 내가 좋아하는 결의 작품들을 즐기고 싶은 목적으로 돈을 내는 기분이 더 크다. 거창한 용어를 쓰자면 후원이고, 감성적으로 포장하자면 하나의 작은 팬 레터를 보내는 것 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사용하지 않아도 돈을 썼다는 것 자체로 이미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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