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잠시 피하여 그치기를 기다리는 일
비그이를 안 한 지 꽤나 오래된 것 같다. 얼핏 기억엔 어릴 땐 종종 했던 것 같다. 비가 온다는 것을 핑계로 집에 안 가고 친구들이랑 남아서 더 놀 수 있어서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비그이를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정해진 일정이 생기니 비가 오더라도 뛰어서라도 가야 했다. 뒤에 학원이 없어도 숙제하고 영단어를 외우려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했기에 넋 없이 비를 바라볼 순 없었다. 예상치 못한 비가 오면, 용돈을 받던 시기에는 그냥 뛰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시간은 금보다 비싸다는 말을 핑계로 편의점에서 바로 비닐우산을 샀다.
비그이를 하지 않자 비는 내게 방해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인식이 내가 비를 싫어하는 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이동해야 할 땐 비가 정말 싫은데 비를 감상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그냥 내리는 모습보단 지붕 끝에서 떨어지는 모습들을 좋아한다. 혼자서는 떨어지기 싫다고 버티다가 두셋이라도 모여야 손잡고 떨어지는 모습들. 혹은 작은 굴곡이라도 있으면 방울들이 줄기가 되어 내리는 모습들. 이런 줄기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나뉘었다가를 반복하고 한 줄기 안에서도 이어졌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모습들. 이런 모습들은 비그이를 할 때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꼭 그렇게 비를 뚫고 다녀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뒤에 일정이 있는 경우에는 시간을 지키기 위해 비그이를 하지 못하겠지만, 그게 아닌 경우에는 조금 여유를 부려도 괜찮지 않았을까. 살다 보면 무작정 해결하려고 부딪히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왜 비에게는 그러지 못했을까. 시간을 핑계로 뛰어든 내게 남은 것은 현관 구석에 응어리처럼 쌓인 비닐우산들과, 그래도 막지 못한 것들 때문에 나빠진 기분과,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챙기지 못한 나에 대한 자책이었다. 과연 이 모든 것을 여유와 감상으로 바꿀 수 있는 비그이보다 아낀 시간들을 알차게 사용했을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말. 보통은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 쓰인다. 하지만 가끔은 시간도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서 써도 되지 않을까. 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최대한 빨리 없애려고 하는 편이다. 어쩌면 이런 감정들이 내겐 비 같은 존재이지 않았을까. 어떻게든 부딪혀서 해결하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내 삶에 거슬리는 방해물처럼 취급이 된 게 아닐까. 그렇게 급하게 해결하려다 응어리와 자책만 남게 된 게 아닐까. 비그이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시간을 두고 바라봤다면 점차 다른 의미로 소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가 오는 것을 지켜봐야 비가 그치고 해가 뜨는 모습도 온전히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