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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Jun 25. 2023

섬광처럼 가슴에 박힌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감정은 무엇일까? 대부분 사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도 다르지 않다. 가장 강력한 감정을 딱 하나 꼽으라고 하면 사랑이라고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으로, 사랑만큼 강력한 감정을 하나 골라본다면? 누군가는 행복, 기쁨, 즐거움을 고를 것이고 슬픔, 무서움, 두려움을 고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성취감, 승부욕, 투지 같은 마음이나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욕구도 후보에 있을만하다. 각자 살아온 삶의 경험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나는 원래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 진심으로 움직이게 만들고, 지치지 않게 하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감정. 일 외에 열정을 쏟는 취미가 하나쯤은 있어야 살아갈 맛이 난다고 말하고 다니곤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이보다 훨씬 강력한 감정을 마주했다.


서울 국제 도서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처음 가보는 도서전에 며칠 전부터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집을 나서면서 마치 매니저인 양 단 한치의 동선 낭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계획을 점검해 본다. 강남역 을밀대에서 점심을 먹고, 코엑스로 가서 도서전을 보고, 설입에 고양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신림역으로 가서 저녁 약속을 소화하면 되겠군. 완벽하다. 순간 완벽이란 단어에 기시감이 든다. 뭐지? 이렇게 완벽한 하루인데 왜 기시감이 들지? 물론 하루는 완벽했다. 완벽하지 못한 건 내 정신머리였다. 지갑을 두고 나온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동선이라는 같은 길 세 번 연속 걷기를 시전하며, 마침 지갑이 머리에 들어온 김에 다시 한번 다짐한다. 오늘은 조금만 써야지. 아직 사놓고 안 읽은 책도 많고, 곧 있을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서도 돈을 쓸 테니. 정말로 고심하고 고심해서 엄선하고 엄선한 책만 사야지.


지갑까지 두고 오면서 견고하게 재벌까지 했건만 단 네 글자에 이 다짐은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평양냉면. 책마을이라는 독립출판 코너에 평양냉면 에세이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네 글자를 무기로 나를 무너트린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취향이나 관심사가 뚜렷한 사람이라면 반가운 마법의 단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여러 글들을 흘러가면서 보다가도 발견한 순간 어? 하면서 멈추게 만드는 단어.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드는 단어. 나에게도 그런 단어들이 있다. 데자와라던가, 이날 나를 홀린 평양냉면이라던가. 말 그대로 홀린 듯이 책을 샀다. 마침 점심도 을밀대에서 먹고 왔는데, 이것이 운명인가? 책을 안 사면 3대가 저주를 받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제가 완료된 순간 정신이 돌아온다. 아, 이제는 진짜 진짜 심사숙고해야지.


하지만 반가움은 또다시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이번 반가움은 이름이었다. 글쓰기 시작한 후 필명으로 '리타'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데, 나랑 같은 필명을 가진 안리타 작가님을 만났다. 안리타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곳은 노들섬에 있는 노들서가였다. 노들서가에는 여러 독립출판물도 있는데 거기서 <리타의 정원>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이때도 '리타'라는 이름에 바로 끌려서 읽어봤다. 이름뿐만 아니라 문체도 너무 마음에 들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도서전에서 실제로 뵈니 너무 반가웠다. 이번 기회에 책도 두 권 더 사고 가볍게 인사도 나눠볼 수 있었다.


반가움을 사랑만큼 강력하다. 두 감정 모두 우리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가항력적이다. 하지만 사뭇 다른 불가항력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무기에 비유하자면 엄청나게 큰 태도나 망치로 찍어누르는 느낌이다. 다가오는 걸 알아도 막지 못하고 점점 커지는 힘에 불가항력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게 바로 사랑이다. 이에 비해 반가움은 총알 같은 느낌이다. 반가움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전조와 빌드업이 없으니 '보다 보니 반갑네', '점점 반가워지고 있어'같은 표현도 없고, 지속의 개념도 없어서 '반가운 중이야', '더 반갑고 싶다', '그만 반갑고 싶다'같은 표현도 쓰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새 이미 섬광처럼 날아와 박히고, 박혔다는 사실만 남은 채 끝나는 감정. 계획과 다르게 돈은 쓰게 되었지만 덕분에 좋은 책들을 얻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도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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