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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Jul 02. 2023

이들의 예술

소녀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하얀 깃털을 걸친 발레리나가 두 팔로 머리 위에 그린 원이 동그란 구가 되는 순간 자신의 발끝을 멍하니 쳐다본다. 한참을 TV와 발끝을 번갈아 쳐다보다 엉덩이를 바닥에 떼며 일어난다. 발꿈치도 그대로 바닥에서 뗀다. 서서히 왼쪽 어깨는 뒤로, 오른쪽 어깨는 앞으로 밀어본다. 곧바로 바닥에 두 팔과 두 다리가 붙고 말았지만 다시 바닥과 닿는 면적을 최소로 만들어본다.


소녀가 매일같이 양 팔을 그러모으며 돌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쉰다. 발레 하면 순백의 백조 같은 모습이 떠오르지만 소녀가 가진 순백이라곤 강하게 돌 때 머리에서 떨어지는 하얀 점들뿐이었다. 원피스는 곳곳이 늘어지며 누레지고, 흐르는 땀은 이내 땟국물이 되어 투명함을 잃어간다. 하지만 소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발끝이 몸의 중심이 되어가는 것에만 집중을 한다. 소녀가 바라는 것은 발레리나가 아니었다. 도는 것. 그저 도는 것이 그녀의 예술이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소녀는 어제도 오늘도 예술을 해나가고 있다. 아, 이 소녀의 예술을 인정하는 이들이 있긴 있다. 말 그대로 이들이 있다. 소녀의 머리카락 속에 사는 머릿니들.


요즘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숙주 지키기 운동이다. 오늘도 뒷골 광장에서 많은 이들이 모여 연설을 듣고 있다.


“여러분! 우리는 현재 심각한 숙주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히 머리카락의 손상으로 인한 숙주 온난화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머리카락은 햇빛으로부터 체표면을 보호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최근 무분별한 머리카락 손상으로 인해 평균 체표면 온도가 0.3도나 상승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저희 체질 학자가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과거에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자 뜨거운 급류와 각종 독성 물질의 거품이 온 체표면을 뒤덮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리 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기생물들이 멸종하는, 말 그대로 숙주가 파괴되는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숙주를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뒷골 광장을 지나 뒤통수 단지로 오면 큰 연구소가 있다. 이들은 이 곳에서 소녀의 예술에 대해 탐구를 한다. 이들에게는 숙주가 예술이다. 정확히는 이들에겐 예술의 정의가 숙주다. 이들은 숙주를 넘어 이 세상에 숙주 같은 예술이 또 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숙주와 같은 예술을 찾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동안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소녀 같은 춤을 추고 있으면 모두가 예술이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예술로 인정된 소년의 문제로 뒤통수 연구소에서 학회가 열렸다.


발견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밝혀진 게 거의 없는 소년은 예술을 탐구하는 이들에게 가장 신비로운 대상이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소년을 관찰하던 이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어? 같이 도는 파트너가 있습니다.”


“뭐라고요? 둘이서 같이 돌고 있다고요?”


“네. 분명히 둘이서 서로를 마주 보며 돌고 있습니다. 이런 예술은 처음 봅니다. 다른 무언가랑 돌더라도 간단한 소품을 들고 도는 정도였지 회전의 중심이 몸 밖으로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파트너인 꼬마는 소년의 허리께 밖에 오지 않지만 이래서는 소년의 예술인지 둘의 예술인지 모르겠네요.”


여기까지만 해도 찜찜한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발견된 내용이 훨씬 충격적이었다. 소년의 근처에서 아이들이 모여 춤추는 길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춤이라고 하기 애매한 몸짓도 많았지만 그 중에는 분명 소년만큼, 혹은 소년보다 더 예술 같은 아이들도 있었다. 까딱하면 엄청난 수의 예술이 추가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예술의 정의를 정확히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오늘 열린 예술 학회에서 이들은 고심 끝에 예술의 조건을 만들었다.


“자신의 구역에서 독보적으로 작품의 주인공이 될 것”


이 조건으로 인해 길거리에 모여서 춤추는 아이들은 예술이 되지 못했다. 소년도 예술의 지위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그 여파는 단순히 문장 하나 만들고 분류 하나 바꾼 것만큼 작지 않았다. 다른 예술들보다 비교적 왜소했던 몸집 때문에 약자의 설움처럼 느껴진 탓일까. 작고 가여운 소년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너무하다면서 소년을 동정하는 항의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상관없다. 소년과 꼬마는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춤을 춰왔고, 춤을 추고 있고, 춤을 춰나갈 것이다.




명왕성이 행성이어도 되는가에 대한 논란이 처음 생긴 건 위성 카론이 발견되면서였다. 카론은 지름이 명왕성의 절반이나 될 정도로 컸다. 둘의 질량중심은 명왕성 내부가 아니라 우주 공간에 있어서 명왕성도 같이 공전할 정도였다. 이에 이 둘을 행성과 위성의 관계로 보아야 할지 이중 행성이라 해야 할지 논란이 생겼다.

명왕성과 카론의 움직임 (출처: 위키백과)

그러다 명왕성 근처에서 엄청난 얼음덩어리들의 군집인 카이퍼 벨트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에리스처럼 명왕성보다 큰 천체도 있었다. 이들을 모두 행성으로 받아들이기엔 행성 후보가 수천 개가 넘어갔다. 이에 2006년에 열린 국제천문연맹 총회에서 태양계 행성의 조건에 “궤도에 있는 다른 물체들을 모두 쓸어버릴 -원문은 cleared away, 자신에게 떨어지게 하거나, 위성으로 잡아두거나, 궤도 밖으로 쫓아낼- 정도로 중력이 커야 한다"라는 조건이 추가되었고, 명왕성은 행성에서 왜소행성으로 분류가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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