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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Aug 20. 2023

오늘 나는 행복으로 할래

요즘 지쳐가는 게 느껴졌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가치관을 다듬은 뒤로 멘탈이 단단해져 웬만한 자극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여러 상황들이 겹쳤다. 흉흉한 사회 사건들은 심적으로 심란하게 만들고 회사는 큰 프로젝트 마무리가 다가오면서 바빠진 데다가 자존감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도 했다.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두다간 수렁에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득 춘천에 여행 갔을 때 들렀던 책과인쇄박물관에서 산 엽서가 생각났다. 엽서는 숙소의 다음 분들께 선물로 남기고 갔지만 그 메시지는 오늘의 나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오늘의 내게 아무런 거리낌이나 부담 없이 하고 싶은 것을 즐기는, 마음의 휴가를 주기로 했다. 최고는 아니어도 최대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며 달려왔던 나에게, 오늘만큼은 어떤 기준점도 없이 자유롭게 즐기는 하루를 선사하기로 했다. 에세이를 쓸 때도 원래는 어떤 메시지나 의미로 조각들이 모였을 때 쓰곤 했지만, 오늘은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그냥 하루의 경험을 써보려 한다.


휴가의 시작은 아이유님의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전시 <순간,>이었다. 유애나로서 안 갈 수가 없는 전시였고, 역시나 대만족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마지막 공간에서 여러 음원을 듣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여러 곡들의 초기 기획 단계 버전, 가이드 녹음 버전 등 날것 그대로의 음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작품의 결과보다는 과정과 스토리를 좋아해서 그런지 아직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감상을 하고 있었는데 마시멜로 탈을 쓴 사람이 나타났다. 전시 가기 전 목요일에 아이유님이 몰래 마시멜로 탈 쓰고 있었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들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같이 사진은 찍었다. 전시가 끝나고 MD를 둘러보다가 가사집이 있었다. 글을 모으는 사람으로서 홀린 듯이 샀는데, 사고 보니 그냥 가사집이 아니라 손글씨로 가사를 쓴 가사집이었다. 보자마자 진짜로 행복했다.


두 번째 일정은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요시다 유니 작가님의 전시였다. 이분의 작품을 보다 보면 사물에 대한 인식과 해석, 이들을 변화시켜 조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밖에 안 나온다. 특히 전시회에서는 단순히 작품만 있던 게 아니라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의 스케치, 실제 작품을 만들었던 소품들도 같이 있어서 더 마음에 와닿는 전시였다. 예전부터 플레잉 카드를 테마로 한 작품들을 좋아해서 다양한 일러스트의 플레잉 카드를 수집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의 'Playing Cards' 주제 구역에 들어서는 순간 매료되고 말았다. 몇십 분 동안 떠나지 못하고 계속 감상하다가 그래도 이곳에 평생 살 순 없으니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나왔다. 그런데 기념품으로 이번 전시 작품인 플레잉 카드북을 팔고 있었다!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SHUT UP AND TAKE MY MONEY! 오늘 왜 이리 행복하지.


마지막 일정은 칵테일바 BAR CHAM 이었다. 예전에 추천받았지만 서울 북부에 갈 일이 없어서 리스트에 적어두기만 했는데 이번에 석파정 서울미술관에 간 김에 들러보기로 했다. 혼자 칵테일바를 간다는 건 내겐 큰 일탈이다. 취직을 하면서 다시 혼자 자취를 시작한 뒤로 혼술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술을 줄여야 하는 건강상의 신호는 없긴 했지만 칵테일 만드는 취미가 있기도 하고 다양한 술을 마셔보는 걸 좋아해서 아무런 제약이 없으면 집에서 홀짝홀짝할 게 뻔히 그려지기 때문에 스스로 제약을 걸었다. 그렇게 1년 반 동안 열심히 지켰던 규율을 오늘의 마음의 휴가를 위해 깼다.


나도 창작 칵테일을 개발하는 걸 좋아해서인지 칵테일바를 가면 그 가게의 시그니처 칵테일을 유심히 본다. 독특한 고유의 시그니처 칵테일이 잘 되어있는 바를 좋아한다. 그런 점에서 이 칵테일바는 완벽했다. 위스키 샷을 제외한 모든 메뉴가 시그니처 칵테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각 칵테일마다 고유의 의미와 스토리가 있었다. 게다가 가게의 이름인 '참'에 맞게 테이블과 의자도 모두 참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가게는 품질이나 서비스보다 고유의 철학을 잘 담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정성스러운 생각과 철학을 즐기고 있다는 것에 너무 행복했다. 게다가 시그니처 칵테일들의 결도 내 취향과 너무 잘 맞았다. 더 많이 마시지 못하는 내 주량이 아쉬울 정도였다.


사실은 지친 마음에 별 기대 없이 정한 하루였다. 자기 최면이라도 걸어서 오늘 하루는 어떻게든 행복의 기분을 내보자 했던 휴가였는데 정말로 이렇게 행복을 경험할 줄은 몰랐다. 지갑은 조금 행복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건 월급날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하루를 반복해야겠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푹 즐기고 나니 훨씬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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