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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Aug 26. 2023

나는 아직 저점이다

요즘 드럼 학원에 다니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이후로 처음으로 학원에서 음악을 배워본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안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학원 자체가 거의 10년 만인 것 같다. 이제 겨우 한두 달밖에 안 됐지만, 가장 많이 드는 느낌은 '어렵다'였다. 빠른 속도에서 일정한 리듬을 지키는 것도 어렵기도 하고 아직은 손힘이나 팔힘이 부족한 것도 느껴지지만 역시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사지 분리다. 내 팔과 다리는 어쩜 그렇게 사이가 좋은지 서로 다른 패턴을 즐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오랜만이라는 감정은 학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벽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내게 굴곡이 없는 인생을 산다고 하신다. 성취한 결과만 보면 실패 없이 모든 것을 해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재능일까 노력일까 운일까. 물론 셋 다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는 길을 찾는 능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각을 잘 본다. 어떻게든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어떻게 해도 실패할 일인지 잘 느끼는 편이다.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성공할 만한 것에만 손을 대는 회피형 성공 인재였다. 원래 성격대로면 드럼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경험은 해보고 하는 말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부딪혀보고 싶었다.


회피형 성공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가 높은 자존감이 과연 좋기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최근 1년 동안 정말 자존감이 높았다. 내 인생에서의 최고치일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봐도 나만큼 인생이 행복하고 나 자신이 좋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물론 내 단점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만큼 좋은 장점도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회피형 성공이라는 모토에 맞게 단점을 극복하는 것보단 장점을 살리는 활동을 많이 했다. 글쓰기를 비롯한 다양한 창작 활동도 이 일환이다. 당연히 어제의 나보단 발전해나가는 삶이지만, 발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기 위로를 하면서 내 다른 면을 외면한 채 허영심에 빠져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점을 직시하고 느끼는 게 정말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괜히 자존감만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가본 적 없는 길은 일단 걸어보고 말하자는 마음이 이미 움직였다. 내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려고 할 땐 문장을 하나 정하는 편이다. 생각해 보니 취준을 하던 시기에 자소서에 내 자랑을 늘어놓고 면접에서 당당해지기 위해 되뇌었던 문장인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이 자존감이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엔 어떤 문장을 만들어볼까. 단점을 마주하고 극복하려는 마음이지만 부족하다, 못났다 같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자존감을 해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희망차고 긍정적인 표현은 나를 자극할 수 없어서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어이없었다. 이 무슨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주문인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단어의 미묘한 풍미를 깎을 줄 알아야 하고, 어떻게든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고 싶었다. 며칠간 고심한 끝에 드디어 맘에 드는 문장을 완성했다.


나는 아직 저점이다.



취준 때 했던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라는 말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번 문장은 퇴근하고 자기개발 시간에 돌입하기 전에 되뇌인다. 나는 아직 저점이다. 왠지 모르게 투지가 생긴다. '아직'이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한 기대감의 두근거림과 '저점'이라는 표현에서 오는 호승심이 잘 어우러지면서 힘이 난다. 그래, 나는 아직 저점이다. 내 앞엔 오르막길만 남았다. 나를 위해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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