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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Sep 18. 2023

가장 오래된 취미

생일이 다가오면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생각해 보게 된다. 원래는 선물을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뭘 생각해두냐 했다. 친구 생일 때 받고 싶은 선물 있냐고 물어봤는데 '아무거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미리 어느 정도는 생각해두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갖고 싶은 게 뭐가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 봤는데 사실 검소한 편은 아니어서 선물로 받을만한 금액 대는 이미 다 샀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누군가에 받는다는 의미로 좋은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책이 바로 생각났다. 내 취향대로 책을 고르다 보면 항상 보던 것만 보게 되어서 새로운 책을 접하고 싶기도 했고, 감명 깊었거나 내게 추천하는 책을 골라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거라 생각했다. 생각했다고 해서 먼저 주변에 사달라고 얘기하고 다니진 못하지만, 어떤 선물 받고 싶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겐 올해에는 책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렇게 다 합쳐서 열 권 정도 선물로 받았다.


책을 꽤 받은 김에 집에 책이 몇 권 있는지 세어봤는데, 기술도서를 제외하고도 어느새 백 권이 넘었다. 작년에 다시 자취를 시작했을 때 집에서 가져온 책이 없으니 순수하게 새로 모은 책이 백 권이 넘었다. 읽은 책이 53권, 아직 안 읽은 책이 49권으로 다행히 읽은 책이 더 많았다. 양쪽 벽이 직접 모은 책으로 가득 찬 방을 가지는 로망이 있는데, 잘 이뤄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러면서 요즘 제1취미가 바뀌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취미가 많은 편인데 그중 가장 의미 있는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항상 칵테일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창작 칵테일로 인정을 받기도 했고, 자격증도 있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한 분야기도 했다. 진지하게 자퇴하고 바텐더를 할까 고민을 하기도 했고, 언젠가 내 개인 칵테일 바를 차리는 걸 꿈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 칵테일이 취미라고 말하면 '그럼 집에서 칵테일 많이 해드세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막상 여기에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혼술은 하지 않기로 다짐한 후로 친구들이 놀러 올 때만 만들어주는 정도로만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늘고 있다. 점점 시간 비중이 줄어드는 칵테일과 달리 책은 읽는 시간이 점점 늘고 있다. 위에서 말한 로망을 이루고자 전부 종이책으로 사서 읽기 때문에 집에서 물리적으로 차지하는 비중도 꽤 커졌다. 꿈이었던 칵테일바도 북바의 방향은 어떨까 하면서 책도 꿈에 한 발짝 걸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1취미를 책이라고 해야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책은 내게 가장 오래된 취미였다. 그림책을 읽던 어린 시절부터 초등학교 땐 신기한 스쿨버스와 앗 시리즈, 중학교 땐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시리즈와 판타지/무협 소설, 고등학교 땐 사회학/인문학을 거쳐 최근에는 에세이를 가장 많이 읽는데 이렇게 종류는 바뀌어도 책을 안 좋아했던 시절이 없었다.


그런데 가끔 멍 때리면서 의미 없이 책을 읽을 때가 있다. 글자는 읽는데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글자만 읽다가 갑자기 다시 정신이 돌아오면 뒤로 되돌아가 다시 읽곤 한다. 책을 읽는 건 재미던 지식이던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삶을 간접경험하던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글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이렇게 멍 때리면 지나가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을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그냥 그렇게 의미 없이 글자만 읽는 시간이 힐링이 된다. 그래도 별생각 없이 요즘 집중력이 부족한가 보다 하고 넘어갔었는데, 최근에 알쓸별잡에서 심채경 박사님이 활자 중독에 대해 하신 이야기에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 약간 활자 중독이어서, 내용이 안 들어올 때가 있어요. 그냥 글자만 읽고 있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자만 읽는 게 위안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가끔 집 화장실에 숨어있는데, 샴푸통 뒷면 같은 걸 보면 하이드로 어쩌구 저쩌구 쓰여있잖아요. 클로로 어쩌구 쓰여있는데 그걸 읽으면서 제가 화학적인 지식을 얻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그냥 그거를 글자니깐 읽고 있는 거예요. 그냥 한 글자 한 글자를 읽고 있고, 유난히 샴푸통 뒤를 한참 읽고 있는 날은 굉장히 힘들었던 날인 거죠.

심채경 박사, <알쓸별잡> 5화


생각해 보니 의미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글자를 읽는 기억이 꽤 있다.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벽에 뭐가 붙어있으면 괜히 하나하나 다 읽어본다. 이미 다 할 줄 알아도 그냥 설명서나 룰북을 읽곤 한다. 인터넷 방송이나 유튜브를 볼 때도 영상 컨텐츠보다 올라오는 댓글들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가 있다. 특히 심채경 박사님이 하신 말씀처럼 힘들 때 글자가 유난히 눈에 더 들어오는 것 같다. 내향인이라서 모임에 오래 있다 보면 에너지가 고갈될 때가 있는데, 나도 모르는 새 술병이나 과자 뒤에 있는 성분표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본능적으로 글자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의 가장 오래된 취미는, 그리고 제1취미는 사실 책이 아니라 활자인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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